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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2025 분열된 시대에 교회가 보는 하나됨의 길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오늘 한국사회의 상황을 한 개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분열(分裂)”일 것 같다. 분열의 영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처럼 한국사회는 그렇게 찢어져 왔다. 남과 북의 분열과 전쟁, 좌파와 우파의 분열, 진보와 보수의 분열, 친미와 반미의 분열, 호남과 영남의 분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분열, 사용자와 노동자의 분열, 남성과 여성의 분열, 의사집단과 간호사집단의 분열, 양성주의과 젠더주의의 분열, 제도권 언론과 1인 미디어의 분열이 가속되어 왔고, 지금은 여당과 야당의 극단적 분열이 한국사회를 갈갈이 찢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가 되게 할 방법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도, 국회도, 법원도, 심지어 이나라의 최후의 보루인 헌법을 다루는 헌법재판소마저도 급기야 진영논리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금이 한국교회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더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시국에 관해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성도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맞는 교회와 신학자들로 헤쳐모이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치유할 수 있을까를 이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사명이 아닐까?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회개가 필요해 보인다. 이는 국난과 재난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성경의 처방이기 때문이다. 교회부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계산들과 편파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구하는 절절한 고백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방정식에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이기적 입력값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선지자 요나와 같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니느웨를 향한 증오와 민족의식으로 충만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저버리고 선교명령을 배신했다. 이는 요나가 정치적 견해와 감정을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요나가 많은가? 교회는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이기심과 편파적 판단들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지혜를 향한 회개기도의 자리에 모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두 번째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같은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각 위격의 개별성과 인격성을 존중하면서도, 사랑으로 서로 섬김으로 하나의 의지를 발현하는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이다. 인격적 개별성의 존중과 자발적 사랑의 섬김을 통한 연합이 하나님 공동체의 양대 원리이다. 이러한 신적 공동체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2개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계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며, 또한 사회적 목표가 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소위 평등한 공동체를 빌미로 각 개인의 인격과 자유로운 표현과 사적인 소유권을 강제로 말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성경적 공동체성은 사랑으로 서로 섬김을 통한 연합을 무시하고 각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와 사적소유를 극단적으로 보장하는 개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또한 용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공동체성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가 이 분열의 시대에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주며, 또 분열됨을 치유할 수 있는 통합적 사회상을 제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청년부에서 이 시국에 관해 가르치고, 토론할 토대와 자신감을 준다. 셋째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일은, 실천의 다양성에 대한 확신과 포용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개신교의 출발점에서부터 발견하는 성경적 원리이다.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이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양심을 따라 일어서서 말했듯이, 성도들이 각자 말씀에 입각한 자신의 양심을 따라 불의와 어두움에 저항하는 사람, Protestant가 되는 것이 우리 개신교의 위대한 전통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Semper Reformata, 개혁은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의 길은 한 사람의 주교나 리더가 지배하는 고요한 천안문 광장 같은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아고라, 시청앞, 용산 광장의 문화에 더 맞는 것 같다. 개신교가 항상 시끄러운 것은 없애버려야할 문화적 폐습이 아니라 개인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개신교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 속에서 참된 민주주의가 키워져 왔다. 오늘 분열의 위기 앞에서 한국교회는 함께 회개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다양한 실천의 길을 가도록 격려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 목표는 나의 주견이나 사심이 아니라 한 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서울신대 교수 (조직신학·기독교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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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예수정신
2025년 새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을사(乙巳)는 60간지 중 42번째에 해당하는 순서인데, 청색을 의미하는 ‘을’과 뱀을 뜻하는 ‘사’가 합쳐져 푸른 뱀의 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을사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왕규의 난(9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을사 추조 적발사건(일명 명례방 사건, 1785),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을사의병(乙巳義兵, 1905) 등이 있다. 모두 이념 갈등이 불러온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지금은 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념 갈등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지만,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합한 역사도 분명 존재했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르조 모르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이다. 나뿐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온 민족을 넘어서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한국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아쉽게 패하며 3, 4위전으로 향했으나 선수들을 비난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하는 과정 모두가 우리 민족에게 이미 신화가 된 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화합의 역사는 어느 과거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흥을 준다. 그러나 최근 5년을 돌아보면 전 세계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는 2020년 3월부터 약 3년 간 전 세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은 정치, 경제, 문화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 ‘멈춤’이라는 큰 장벽을 안겨다 주었고, 이 기간 온 인류는 숨을 죽이듯이 살아갔다. 코로나19가 만든 장벽이 사라진 후에도 전 세계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2월24일 발생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중동의 한복판이라 부를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023년10월7일 오전 06시 30분에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랍의 봄 이후 끝없는 내전 속에서 53년 동안 건재했던 알 아사드 가문의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은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주요 도시와 기지들을 빼앗기고, 2024년12월8일 반군에게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패망하였다. 전쟁과 테러, 내전으로 겪는 육체적·정신적 기근 등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각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적 빈곤과 식량안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고 가야 할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교회와 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학적 갈등과 이념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일’과 ‘기도가 답이다’라는 루터와 칼빈, 리차드 십스가 외쳤던 기도의 신학으로 갈등을 풀어야 한다.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주의 자녀인 우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의 비판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던 삭개오에게 손을 내밀었던 예수의 정신과 신명기 6장 4-9절의 신명기적 사관,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화합의 세상을 만든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88 올림픽 주제가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는 일’이다. 주께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의 벽’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화합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백석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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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2025년 어떤 모습을 가질까? 한국교회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새로운 빛의 세계로 나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처해있는 어둠과 아픔 그리고 부정적인 전망,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온전하게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복음의 계시에 남아있다면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우리는 확실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025년에는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2024년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막막하다. 여러 가지 통계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처해있는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1년에 국민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881만 명인데 비해 2020년에는 741만 명으로 무려 140여 만명 16%이상의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최근의 여러 가지 통계들은 이러한 현실의 내밀한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신자의 감소 현상이 주로 20~40대라는 다음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3040의 현장 예배 이탈 비율이 대략 40%에 이르고 그들 3040중 장차 10년 후 현장예배 이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그럴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울한 현장의 섬뜩한 전망들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분들이 이 현상에 대하여 다름대로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현재가 어두운 까닭은 교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식밖의 일탈 행위를 하고 있으며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비본질적,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뼈아픈 지적은 교회가 자폐환자들처럼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는 점차 동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개선의 징조가 너무 미력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지적을 통해 배워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 자유정신과 그에 부합한 리더쉽, 사회적 봉사를 우선으로 하는 가치 의식을 받아들이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회개를 말하고 성숙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직 그 진정성을 의심받더라도 계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 환경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이제 교회의 본질적 측면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그 중심에 성경적 복음주의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중 일부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표준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중요한 위치에 계신 많은 지도자들이 복음의 절대적 배타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안창호 국가 위원장과 같은 신앙적 단호함이 필요하고 메시지의 선명성이 요청되는 때이다. 세상의 학문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고귀한 정신이 필요하다. 성령의 지혜로 이해되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학문이 요구된다. 이 시대의 정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영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지금처럼 성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을 때 그렇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2025년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서울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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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손님접대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이 그 위력을 다분히 잃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나마 손님대접을 중시하는 기독교에서도 진정한 영성의 추구라기 보다는 다소 희석된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나그네를 집에 맞아들이는 게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며, 또한 손님도 귀한 선물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세 나그네를 영접하여 물과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고기를 대접하자 그들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장차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창 18:1-15).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내주자 엘리야는 기름과 양식을 풍성히 채워주고, 과부의 죽은 아들까지 살려냈다(왕상17:9-24).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합류한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묵게 되자 그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떡을 떼어 주었다(눅 24:13-35). 성경은 여러 일화를 통하여 부지불식간 만나는 손님을 대접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교훈을 준다. 손님대접이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질문했다. 여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다라는 한 가지 대답만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다. 그래서 욥은 내가 이나왔으니 또한 돌아갈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욥1:21)고 찬양했다. 조선의27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44세로 주로 종기, 당뇨,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들의 가장 흔했던 사인은 요즈음 질환 축에도 들지 않는 종기였다. 소독약이나 항생제가 없었고, 의료기술이 전무한 시절에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병이 들면 어떻게 했을까.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감기와 같은 작은 병이면 인내하며 참고, 중한 병에 걸리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경우 백내장으로 진단 받았다. 바흐의 눈을 시술한 치료사는 영국왕 조지2세의 궁정의사인 테일러였지만 그의 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 수정체를 대신 넣는 수술이다. 가열멸균되지 않은 천공용 바늘을 사용했고 수술 후 출혈과 감염이 심각해졌다. 안구에서 시작된 감염증상이 바흐의 온몸으로 퍼지면서 극심한 고열을 가져왔고, 신체기능전반에 이상을 일으켰다. 결국 바흐는 수술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중한 병도 발전된 의료기술로 걱정없이 병을 이겨나간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쳐나야 한다. 마태복음25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떨고 있을 때 옷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준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병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모두다 천국에서 칭찬받을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자들이 주변에 없는 지 살펴보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전 성신여대 부총장, 미드웨스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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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사랑의 실천에 꼭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사랑은 이론만도 아니고 실천만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이란 말은 아주 기가 막힌 조합이다. 사랑이 실천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꽃이 향기를 넘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열매로 결실하게 된다. 향나무는 피톤치드 향기를 내뿜은 나무의 대명사이다. 소나무보다 향기가 진하여 향나무이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쓰기 위해 벼루에 먹을 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향나무 열매를 빻아 넣고 먹을 갈면 끈끈한 액이 붓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향나무 향기가 코끝에 전해지며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향나무가 가장 향기를 많이 품어내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장작으로 패어서 아궁이에 태워질 때이다. 자기를 불사르는 그 순간에 향나무는 향기를 온 누리에 널리 퍼뜨린다. 여기서 몇 가지 사랑의 실천에 필요한 일들이 숨어있다. 첫째, 향나무는 향기를 품는 나무이다. 성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병 속에 담긴 비밀인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지는 곳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자기의 잔을 비워서 나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길을 걸어가는 인생에게 그리스도는 이정표와 같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는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둘째,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자기를 희생할 때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성도를 구원하셨다. 크리스마스카드의 빛이 바래고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와 백화점 트리로 변질한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주간을 지키면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도마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얼마간의 돈을 넣고 연말연시에 각종 모금회에 목돈을 보낸 대가로 얻은 사랑의 열매를 상징하는 배지를 양복에 달고 크리스마스 쌀을 사서 더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기에 그냥 서랍에 처박아 두는 것을 넘어서 내 손과 발이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서 사랑의 쌀 나누기와 사랑의 김치 나누기와 얼굴에 검은 칠을 하면서 연탄을 나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날마다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구체적으로 나의 머리와 생각에서 마음의 길을 따라 행동으로 우러나도록 사랑은 샘물이 솟듯이 펑펑 흘러나와야 한다. 넷째, 어쩌다 떠오르는 사랑의 마음은 금방 식어서 사라진다. 연인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여 애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단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헤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제 자식들을 찬밥 돌리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생사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고 빈정거리며 자식을 짐처럼 여기고 결혼해도 무 자식이 상팔자라고 아이 낳을 시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애완동물만을 끌어 안고서 마치 부부간의 사랑이 영원할 것같이 이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자녀 가정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어긋나는 모습인데, 여기에 동생애 부부까지 가세하여 한국이 전 세계에서 초저출산 위기로 내몰리는 악순환 속에서 인구소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친구 간의 사랑인 우정도 있고, 플라톤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만연된 심포지엄에서 그리는 정신적 사랑인 에로스도 있다. 그런데 우정은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에로스는 처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다가 점차 동물적인 육체의 쾌락과 욕망에 빠져서 동성애의 사랑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우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재창조로 이어지지만, 동성애는 정욕과 음란의 노예가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는다. 결혼하여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과 아예 동성혼과 동성결혼을 통하여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혐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정도 아니고 에로스로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사랑의 원천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일부 녹아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고 어머니의 희생보다 길다. 예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예수 학교로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놀랍게도 예수 학교가 없어서 이들이 만든 예수 학교에 초청되는 교사들과 강사들은 다둥이 가정에 오신 예수님처럼 부부가 결혼한 신학생과 농어촌 개척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모인 예수 학교에는 몽골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강사로 초청되는데 세 명에서 여덟 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의 부모이다. 우리는 예수 학교에서 희망을 본다. 실력 있는 강사는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다둥이 자녀를 출산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가정에 모신 부모이다./한국교회 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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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결혼을 앞둔 리츠코는 이삿짐에서 발견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계기로 약혼자 사쿠에게 짧은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의 행선지가 '시코쿠'임을 안 사쿠는 그녀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첫사랑 아키와의 추억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사쿠는 모두의 선망 대상이던 아키와 우연히 하교 길에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라디오 심야방송에 응모하고, 워크맨으로 음성편지를 주고받으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무인도 여행 후 귀가하던 날, 아키는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병원에 입원한 아키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지만,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사쿠는 큰 슬픔에 잠긴다. 사쿠는 아키의 꿈인 호주의 울룰루로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탈출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공항에서 아키는 다시 쓰러진다. 성인이 된 사쿠는 리츠코를 찾으러 가는 길에 과거의 기억 속 아키를 만나게 된다. 리츠코도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두 사람은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한다. 결국, 전달되지 못했던 아키의 마지막 음성편지가 십여 년의 시간을 넘어 사쿠에게 도착한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찾아온 수채화 빛 슬픔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의 힘과 위대함, 그리고 추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진정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그러한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서로를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으로 만든다. 또한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꿈과 비전은 야망이 되고 만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바벰바 족은 미개 부족 중 하나이지만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부족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를 마을 한복판의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그리고 광장에 몰려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든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아주 큰 소리로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외친다. 바로 그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을 칭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장점, 착한 행동, 그리고 미담들을 하나씩 열거하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해야 한다. 심지어 판사조차도 죄인을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반드시 좋은 것만 말해야 한다.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이 걸려서 하는 이러한 칭찬이 바닥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이 놀라운 칭찬은 죄인의 위축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즌다. 이러한 칭찬 축제로 인해 바벰바 족 사회에서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장 8절)라고 교훈하고 있다. 인간이 지은 수많은 죄와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다. 갈보리 언덕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인류를 변화시다. 주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과 젊은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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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2025 분열된 시대에 교회가 보는 하나됨의 길
-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오늘 한국사회의 상황을 한 개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분열(分裂)”일 것 같다. 분열의 영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처럼 한국사회는 그렇게 찢어져 왔다. 남과 북의 분열과 전쟁, 좌파와 우파의 분열, 진보와 보수의 분열, 친미와 반미의 분열, 호남과 영남의 분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분열, 사용자와 노동자의 분열, 남성과 여성의 분열, 의사집단과 간호사집단의 분열, 양성주의과 젠더주의의 분열, 제도권 언론과 1인 미디어의 분열이 가속되어 왔고, 지금은 여당과 야당의 극단적 분열이 한국사회를 갈갈이 찢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가 되게 할 방법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도, 국회도, 법원도, 심지어 이나라의 최후의 보루인 헌법을 다루는 헌법재판소마저도 급기야 진영논리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금이 한국교회에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더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시국에 관해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성도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맞는 교회와 신학자들로 헤쳐모이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 안에 있는 분열과,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치유할 수 있을까를 이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사명이 아닐까?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회개가 필요해 보인다. 이는 국난과 재난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성경의 처방이기 때문이다. 교회부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계산들과 편파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구하는 절절한 고백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방정식에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이기적 입력값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선지자 요나와 같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니느웨를 향한 증오와 민족의식으로 충만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저버리고 선교명령을 배신했다. 이는 요나가 정치적 견해와 감정을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요나가 많은가? 교회는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이기심과 편파적 판단들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지혜를 향한 회개기도의 자리에 모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두 번째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같은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각 위격의 개별성과 인격성을 존중하면서도, 사랑으로 서로 섬김으로 하나의 의지를 발현하는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이다. 인격적 개별성의 존중과 자발적 사랑의 섬김을 통한 연합이 하나님 공동체의 양대 원리이다. 이러한 신적 공동체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2개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계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며, 또한 사회적 목표가 된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공동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소위 평등한 공동체를 빌미로 각 개인의 인격과 자유로운 표현과 사적인 소유권을 강제로 말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성경적 공동체성은 사랑으로 서로 섬김을 통한 연합을 무시하고 각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와 사적소유를 극단적으로 보장하는 개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또한 용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공동체성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가 이 분열의 시대에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주며, 또 분열됨을 치유할 수 있는 통합적 사회상을 제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청년부에서 이 시국에 관해 가르치고, 토론할 토대와 자신감을 준다. 셋째로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일은, 실천의 다양성에 대한 확신과 포용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개신교의 출발점에서부터 발견하는 성경적 원리이다.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이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양심을 따라 일어서서 말했듯이, 성도들이 각자 말씀에 입각한 자신의 양심을 따라 불의와 어두움에 저항하는 사람, Protestant가 되는 것이 우리 개신교의 위대한 전통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Semper Reformata, 개혁은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개신교의 길은 한 사람의 주교나 리더가 지배하는 고요한 천안문 광장 같은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아고라, 시청앞, 용산 광장의 문화에 더 맞는 것 같다. 개신교가 항상 시끄러운 것은 없애버려야할 문화적 폐습이 아니라 개인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개신교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 속에서 참된 민주주의가 키워져 왔다. 오늘 분열의 위기 앞에서 한국교회는 함께 회개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다양한 실천의 길을 가도록 격려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 목표는 나의 주견이나 사심이 아니라 한 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서울신대 교수 (조직신학·기독교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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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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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2025 분열된 시대에 교회가 보는 하나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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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예수정신
- 2025년 새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을사(乙巳)는 60간지 중 42번째에 해당하는 순서인데, 청색을 의미하는 ‘을’과 뱀을 뜻하는 ‘사’가 합쳐져 푸른 뱀의 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을사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왕규의 난(9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을사 추조 적발사건(일명 명례방 사건, 1785),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을사의병(乙巳義兵, 1905) 등이 있다. 모두 이념 갈등이 불러온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지금은 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념 갈등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지만,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합한 역사도 분명 존재했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르조 모르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이다. 나뿐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온 민족을 넘어서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한국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아쉽게 패하며 3, 4위전으로 향했으나 선수들을 비난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하는 과정 모두가 우리 민족에게 이미 신화가 된 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화합의 역사는 어느 과거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흥을 준다. 그러나 최근 5년을 돌아보면 전 세계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는 2020년 3월부터 약 3년 간 전 세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은 정치, 경제, 문화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 ‘멈춤’이라는 큰 장벽을 안겨다 주었고, 이 기간 온 인류는 숨을 죽이듯이 살아갔다. 코로나19가 만든 장벽이 사라진 후에도 전 세계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2월24일 발생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중동의 한복판이라 부를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023년10월7일 오전 06시 30분에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랍의 봄 이후 끝없는 내전 속에서 53년 동안 건재했던 알 아사드 가문의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은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주요 도시와 기지들을 빼앗기고, 2024년12월8일 반군에게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패망하였다. 전쟁과 테러, 내전으로 겪는 육체적·정신적 기근 등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각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적 빈곤과 식량안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고 가야 할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교회와 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학적 갈등과 이념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일’과 ‘기도가 답이다’라는 루터와 칼빈, 리차드 십스가 외쳤던 기도의 신학으로 갈등을 풀어야 한다.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주의 자녀인 우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의 비판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던 삭개오에게 손을 내밀었던 예수의 정신과 신명기 6장 4-9절의 신명기적 사관,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화합의 세상을 만든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88 올림픽 주제가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는 일’이다. 주께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의 벽’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화합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백석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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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예수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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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한국교회는 2025년 어떤 모습을 가질까? 한국교회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새로운 빛의 세계로 나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처해있는 어둠과 아픔 그리고 부정적인 전망,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온전하게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복음의 계시에 남아있다면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우리는 확실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025년에는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2024년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막막하다. 여러 가지 통계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처해있는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1년에 국민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881만 명인데 비해 2020년에는 741만 명으로 무려 140여 만명 16%이상의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최근의 여러 가지 통계들은 이러한 현실의 내밀한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신자의 감소 현상이 주로 20~40대라는 다음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3040의 현장 예배 이탈 비율이 대략 40%에 이르고 그들 3040중 장차 10년 후 현장예배 이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그럴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울한 현장의 섬뜩한 전망들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분들이 이 현상에 대하여 다름대로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현재가 어두운 까닭은 교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식밖의 일탈 행위를 하고 있으며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비본질적,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뼈아픈 지적은 교회가 자폐환자들처럼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는 점차 동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개선의 징조가 너무 미력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지적을 통해 배워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 자유정신과 그에 부합한 리더쉽, 사회적 봉사를 우선으로 하는 가치 의식을 받아들이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회개를 말하고 성숙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직 그 진정성을 의심받더라도 계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 환경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이제 교회의 본질적 측면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그 중심에 성경적 복음주의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중 일부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표준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중요한 위치에 계신 많은 지도자들이 복음의 절대적 배타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안창호 국가 위원장과 같은 신앙적 단호함이 필요하고 메시지의 선명성이 요청되는 때이다. 세상의 학문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고귀한 정신이 필요하다. 성령의 지혜로 이해되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학문이 요구된다. 이 시대의 정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영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지금처럼 성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을 때 그렇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2025년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서울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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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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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손님접대
-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이 그 위력을 다분히 잃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나마 손님대접을 중시하는 기독교에서도 진정한 영성의 추구라기 보다는 다소 희석된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나그네를 집에 맞아들이는 게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며, 또한 손님도 귀한 선물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세 나그네를 영접하여 물과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고기를 대접하자 그들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장차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창 18:1-15).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내주자 엘리야는 기름과 양식을 풍성히 채워주고, 과부의 죽은 아들까지 살려냈다(왕상17:9-24).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합류한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묵게 되자 그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떡을 떼어 주었다(눅 24:13-35). 성경은 여러 일화를 통하여 부지불식간 만나는 손님을 대접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교훈을 준다. 손님대접이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질문했다. 여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다라는 한 가지 대답만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다. 그래서 욥은 내가 이나왔으니 또한 돌아갈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욥1:21)고 찬양했다. 조선의27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44세로 주로 종기, 당뇨,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들의 가장 흔했던 사인은 요즈음 질환 축에도 들지 않는 종기였다. 소독약이나 항생제가 없었고, 의료기술이 전무한 시절에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병이 들면 어떻게 했을까.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감기와 같은 작은 병이면 인내하며 참고, 중한 병에 걸리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경우 백내장으로 진단 받았다. 바흐의 눈을 시술한 치료사는 영국왕 조지2세의 궁정의사인 테일러였지만 그의 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 수정체를 대신 넣는 수술이다. 가열멸균되지 않은 천공용 바늘을 사용했고 수술 후 출혈과 감염이 심각해졌다. 안구에서 시작된 감염증상이 바흐의 온몸으로 퍼지면서 극심한 고열을 가져왔고, 신체기능전반에 이상을 일으켰다. 결국 바흐는 수술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중한 병도 발전된 의료기술로 걱정없이 병을 이겨나간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쳐나야 한다. 마태복음25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떨고 있을 때 옷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준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병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모두다 천국에서 칭찬받을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자들이 주변에 없는 지 살펴보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전 성신여대 부총장, 미드웨스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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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손님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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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사랑의 실천에 꼭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 사랑은 이론만도 아니고 실천만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이란 말은 아주 기가 막힌 조합이다. 사랑이 실천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꽃이 향기를 넘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열매로 결실하게 된다. 향나무는 피톤치드 향기를 내뿜은 나무의 대명사이다. 소나무보다 향기가 진하여 향나무이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쓰기 위해 벼루에 먹을 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향나무 열매를 빻아 넣고 먹을 갈면 끈끈한 액이 붓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향나무 향기가 코끝에 전해지며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향나무가 가장 향기를 많이 품어내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장작으로 패어서 아궁이에 태워질 때이다. 자기를 불사르는 그 순간에 향나무는 향기를 온 누리에 널리 퍼뜨린다. 여기서 몇 가지 사랑의 실천에 필요한 일들이 숨어있다. 첫째, 향나무는 향기를 품는 나무이다. 성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병 속에 담긴 비밀인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지는 곳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자기의 잔을 비워서 나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길을 걸어가는 인생에게 그리스도는 이정표와 같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는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둘째,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자기를 희생할 때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성도를 구원하셨다. 크리스마스카드의 빛이 바래고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와 백화점 트리로 변질한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주간을 지키면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도마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얼마간의 돈을 넣고 연말연시에 각종 모금회에 목돈을 보낸 대가로 얻은 사랑의 열매를 상징하는 배지를 양복에 달고 크리스마스 쌀을 사서 더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기에 그냥 서랍에 처박아 두는 것을 넘어서 내 손과 발이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서 사랑의 쌀 나누기와 사랑의 김치 나누기와 얼굴에 검은 칠을 하면서 연탄을 나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날마다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구체적으로 나의 머리와 생각에서 마음의 길을 따라 행동으로 우러나도록 사랑은 샘물이 솟듯이 펑펑 흘러나와야 한다. 넷째, 어쩌다 떠오르는 사랑의 마음은 금방 식어서 사라진다. 연인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여 애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단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헤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제 자식들을 찬밥 돌리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생사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고 빈정거리며 자식을 짐처럼 여기고 결혼해도 무 자식이 상팔자라고 아이 낳을 시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애완동물만을 끌어 안고서 마치 부부간의 사랑이 영원할 것같이 이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자녀 가정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어긋나는 모습인데, 여기에 동생애 부부까지 가세하여 한국이 전 세계에서 초저출산 위기로 내몰리는 악순환 속에서 인구소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친구 간의 사랑인 우정도 있고, 플라톤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만연된 심포지엄에서 그리는 정신적 사랑인 에로스도 있다. 그런데 우정은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에로스는 처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다가 점차 동물적인 육체의 쾌락과 욕망에 빠져서 동성애의 사랑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우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재창조로 이어지지만, 동성애는 정욕과 음란의 노예가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는다. 결혼하여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과 아예 동성혼과 동성결혼을 통하여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혐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정도 아니고 에로스로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사랑의 원천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일부 녹아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고 어머니의 희생보다 길다. 예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예수 학교로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놀랍게도 예수 학교가 없어서 이들이 만든 예수 학교에 초청되는 교사들과 강사들은 다둥이 가정에 오신 예수님처럼 부부가 결혼한 신학생과 농어촌 개척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모인 예수 학교에는 몽골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강사로 초청되는데 세 명에서 여덟 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의 부모이다. 우리는 예수 학교에서 희망을 본다. 실력 있는 강사는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다둥이 자녀를 출산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가정에 모신 부모이다./한국교회 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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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사랑의 실천에 꼭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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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사람을 움직이는 힘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결혼을 앞둔 리츠코는 이삿짐에서 발견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계기로 약혼자 사쿠에게 짧은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의 행선지가 '시코쿠'임을 안 사쿠는 그녀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첫사랑 아키와의 추억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사쿠는 모두의 선망 대상이던 아키와 우연히 하교 길에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라디오 심야방송에 응모하고, 워크맨으로 음성편지를 주고받으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무인도 여행 후 귀가하던 날, 아키는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병원에 입원한 아키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지만,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사쿠는 큰 슬픔에 잠긴다. 사쿠는 아키의 꿈인 호주의 울룰루로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탈출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공항에서 아키는 다시 쓰러진다. 성인이 된 사쿠는 리츠코를 찾으러 가는 길에 과거의 기억 속 아키를 만나게 된다. 리츠코도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두 사람은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한다. 결국, 전달되지 못했던 아키의 마지막 음성편지가 십여 년의 시간을 넘어 사쿠에게 도착한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찾아온 수채화 빛 슬픔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의 힘과 위대함, 그리고 추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진정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그러한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서로를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으로 만든다. 또한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꿈과 비전은 야망이 되고 만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바벰바 족은 미개 부족 중 하나이지만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부족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를 마을 한복판의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그리고 광장에 몰려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든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아주 큰 소리로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외친다. 바로 그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을 칭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장점, 착한 행동, 그리고 미담들을 하나씩 열거하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해야 한다. 심지어 판사조차도 죄인을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반드시 좋은 것만 말해야 한다.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이 걸려서 하는 이러한 칭찬이 바닥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이 놀라운 칭찬은 죄인의 위축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즌다. 이러한 칭찬 축제로 인해 바벰바 족 사회에서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장 8절)라고 교훈하고 있다. 인간이 지은 수많은 죄와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다. 갈보리 언덕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인류를 변화시다. 주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과 젊은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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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 ‘지구 열대화’ 고민해야
- 낯설지 않은 시사용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는 이제 기후 위기(Climate Crisis)로 전환 되었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나 지구촌 인류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자연 재해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위기감이 감지되고 있다. 북극과 남극이 지금 상태로 계속 녹아내리면 언젠가 서울까지 물에 잠기는 상황이 온다는 가상 지도까지 등장했다. 물의 도시로 한 해 수천만 명 관광객이 찾는 베니스, 도시 중앙의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이 물에 잠기는 사태가 수시로 발생한다. 바야흐로 지구 온난화를 넘어서는 기후 위기가 심각해진다.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 국제사회는 탄소중립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자국 이기주의에 몰입되어 ‘너 죽고 나 살자’는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산업은 발전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타 멈추지 못하고, 이익에 눈 먼 세계는 자연과 환경을 착취 수준으로 이용한다. 드디어 2023년 7월 UN 사무총장이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를 선언했다. 온난화를 지나 열대화, 즉 지구가 끓고 있다고 폭탄 선언한 셈이다. 그 원인제공자는 누구일까? 학자는 지목한다. 바로 인류라는 것이다. 지구는 인류의 등장, 즉 '인류세'(Anthropocene)로 인해 더 이상 자체 정화, 자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경고다.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 생명과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구 열대화라는 비극에 기독교가 혹 어떤 부정적 역할을 한 면은 없는가? 돌이켜 봐야할 시점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옷을 찢고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구 열대화에 이른 이 상황을 돌이켜 봐야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이며, 선물이다. 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숨 쉬며 은혜에 기대어 살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연 파괴, 환경 파괴로 다가왔다면 우리의 죄악은 사회적으로도 선을 넘어섰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크리스찬들은 가정, 교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환경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지구 열대화를 막기위한 적극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자연은 하나님의 고귀하신 창조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청지기(Stewardship) 책임을 다해야 한다. 소극적으로 생활 측면에서 절제해야 하지만 교회 차원에서 적극적 대응을 해야한다. 최근 기업, 산업이 도입하고 있는 ESG가 그것이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 차원에서 기후 위기에 대안적 행동을 해야한다. 교회가 구원에 관한 특별은총만 강조하게 된다면, 교회의 공공성은 더욱 사회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교회가 스스로 게토화 되는 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들은 역사가 지금도 재현되어야 한다. 지구 열대화의 시대에 들어선 현재 ESG 도입을 교회가 고려하고 실행해야 한다. 탄소제로, 기후 위기, 환경 회복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며 곧 믿음의 선한 행동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경 파괴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레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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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 ‘지구 열대화’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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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위한 책임을 다하는 총회
- 올해는 9월 18일부터 22일 사이에 통합, 합동, 고신, 백석측 장로교단의 정기총회가 줄줄이 개최된다. 한국교계에서 장로교단은 최대의 주류교단이다. 여타의 교단에서 들으면 섭섭하게 생각하지 모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단례로 예장통합측만 보더라도 111년의 역사와 9,500여개의 교회, 2만 2천여명의 목사와 230만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교단이 서너 개 더 있으니 사실상 한국교회는 장로교단과 장로교단이 아닌 교회로 분류된다고 보아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역사와 최대의 교세를 가진 장로교단이라는 사실이 결코 교단의 크기를 자랑하거나 교세의 힘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계에서 절대적 위상과 교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울림이 크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장로교단은 그 체급에 맞는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할 필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에 주류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 위상에 걸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 해주기를 바라면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기대하고 싶은 점 한 두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한국교계 위상의 제고와 대 사회적, 대 정부적 메시지의 볼륨을 높이는 일이다. 한국교회 위상의 제고는 연합과 일치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일반 성도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교계 연합단체로 나뉘어져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기대가 아니고 당위이다. 물론 연합은 어렵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주류교단 장로교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금년 총회를 통해서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으로서의 위상을 재인식하고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공학적 과제를 넘어 시대를 향한 장로교단의 신앙적 사명으로 인식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요 기도이다. 장로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보다 공고히 하고 그 힘으로 한국사회 전반을 향한 대사회적, 대정부적, 대국민적 메시지를 낸다면 그 목소리는 더욱 큰 울림이 될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던 당시 교회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기대를 담아냈다. 교회의 목소리는 어느 한 시대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대상을 상대로 끊임없는 깨달음을 자초하게 하는 죽비로서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장로교단은 교회연합을 통해 한국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최대의 교세와 능력을 가진 장로교단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한국의 장로교는 자신의 교단내에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품고 리드하는 장자의 리더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나아가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바라는 것은 교단내 정치적 목회적 약자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는 일이다. 단적인 예가 교회내 여성에 대한 정책적 제도적 문제이다. 여전히 여성안수는 미래의 과제로 넘겨지고 있으며 여전히 여성 총대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다행히도 예장합동 총회는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을 위한 안건을 다루고 예장통합은 제도적으로 여성총대 확대방안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아직도 소극적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대가 무르있었다. 조금 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어떨까? 장로교단은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요 한국교회의 최대의 리더교단이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도 목회적 약자에 대하여 소극적 단계조차도 이르지 못한 필자가 소속된 작은 교단이 그런 장로교단을 따라가고 싶기 때문이다. 장로교단 성총회에 하나님의 은총을 빈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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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위한 책임을 다하는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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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갱신해야 교회가 산다
-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교단들을 중심으로 매년 9월은 교단 총회의 계절이다. 성결교단과 순복음 등 몇 교단 총회가 5월에 있고, 대부분의 교단 총회가 9월에 열린다. 총회는 해당 교단의 최고 의결 회의체다. 교단의 헌법에 규정된 내용에 따라 총회가 열리고 안건들을 결의하고 그에 따라 교단의 일 년 살림살이가 진행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교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나 국가의 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교회법을 거룩한 법이라고 한다. ‘교회법이 사회법보다 우선’이라는 대원칙이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불변하는 신앙적 입장인 까닭도 이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교단이나 그 소속 국가의 사법 판결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사회법보다 앞선다. 교단 총회 앞에 거룩하다는 단어를 넣어서 성총회(聖總會)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장로교 교단들에 이른바 ‘장자 교단’의식이 강하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서 두 가지가 중심일 테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장로교의 신학과 교리가 가장 올바르다는 자의식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교인 수와 재정을 중심한 물량적인 교세로 보아서 장로교가 가장 크다는 점이다. 신학적인 점에서야 다른 교단들의 신학적인 전통들도 나름으로 주장하는 바가 있을 테고, 장로교 교단들 안에서도 서로 입장 차이가 나기도 하니 그렇다고 치자. 교세 문제는 한국 교계 전체가 작동하는 데서 현실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장로교가 아닌 교단의 목사로서 장로교 교단들의 장자 의식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장자 의식에서 진짜로 중요한 점이 따로 있다. 장자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의 장남이라면 집안이 어려울 때 자신을 던져서 집을 지켜야 한다. 집안이 어지럽고 기울어져 가는데 나 몰라라 한다면 장자답지 못하다. 옛날의 우리네 삶의 관습으로 한다면 장자에게는 특권도 많고 책임도 무겁다. 이제는 법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부모의 유산 상속에서 장자의 몫이 컸다. 종가집 전통이 내려오는 가문의 재산에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장손이 종가를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책임이 막중했다. 연중 이어지는 제사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형제 친족들 대소사도 꼼꼼히 살피며 가문 전체를 이끌어야 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장자 의식이 절실하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죄에서 돌이켜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누가 먼저든 나서서,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예장통합의 명성교회 세습 논란은 교회 내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의 단면일 뿐이다. 교회의 병폐를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의 상황도 폭발할 정도다. 윤석열정부가 이끄는 우리 사회 안의 심각한 분열과 최근의 일본 오염수 방출 상황,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갈등, 미중의 대결 양상에서 우리나라의 생존 방향, 오늘날 세계의 전쟁과 기후 위기와 빈곤의 문제 등 인류의 삶이 위기다. 장로교 교단들에 바라며 부탁을 드린다. 장자 교단, 현실적으로 맞다. 한국 교회의 중심 흐름을 장로교 교단들이 이끌어 왔다. 그만큼 한국 교회 역사의 영욕(榮辱) 양면 모두에 장로교가 연관되어 있다. 2023년은 어쩌면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회복할 마지막 몇 년의 시작일지 모른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 장로교 교단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이후 한국 교회의 상황이 상당 부분 걸려 있다. 9월 총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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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갱신해야 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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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와 복음의 본질
-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과의 해석을 통해 복음을 살아내며 세상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공동체이다. 복음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느슨해진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이며, 그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마다, 끊임없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항상 기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의 삶에 투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로 그 존재의미를 확증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론으로 인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과 단절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잃은 지점은 어디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가 사회문화의 지배적 가치관과 타협하고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이 제도화와 세속화의 덫에 갇힐 때, 복음을 살아낼 능력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잃어버리며, 회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상실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급진적 회심은 교회의 삶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핵심 요소이다. “과연 서구가 회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레슬리 뉴비긴이 37년간 인도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국의 상황을 직시하며 던진 질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회심”에 관해 심각한 도전적 질문이 필요하고, 그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와 계기와 필요하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글로벌 사회문화의 변화에 맞물려 한국 사회문화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몰락을 촉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이다.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에 대해 비탄에 젖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굴복과 회개를 통해 돌아오라는 부르짖음을 외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교회가 다시 재발견해야 할 핵심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롭게 갱신된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가 일으킨 개인과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좌표를 새롭게 한 '선교운동'이며 '복음 운동'이었다. 이제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허물과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요구한다. 2023년 2월 8일, 미국의 변방인 미국 켄터키주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상처, 두려움, 절망, 소외감, 박탈감,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Z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날, 수요 채플 후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하는 학생들은 남아서 기도하자”라는 설교자의 도전에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교수나 목사 혹은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이 강단 앞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고, 작은 기도 모임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부흥 운동으로 점화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 퍼지고 있다. 16일 동안 이어진 에즈베리 대학교 부흥 집회는 단순히 내부로 집중된 내향적 운동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와 주변의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이 하나님을 열망하게 하시고 복음에 겸손히 순종하게 하셨다. 에즈베리 부흥 운동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예언자적 비탄과 슬픔, 애통함을 보며, 죄의 용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발견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부흥 운동은 사회문화와 세대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각성 운동이며 갱신 운동이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의 변혁을 가져오는 운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참된 부흥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부흥과 갱신은 인간 편에서 급진적 겸손과 전적인 굴복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2024년 9월 로잔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고백과 회개 운동으로서 복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의 영적 활력과 사회문화적 변혁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서울신대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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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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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와 복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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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 어둡고 공허한 미지의 땅 조선에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선교사들이 있다. 이 분들의 신앙과 연합정신,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출발했다. 그러나 광복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의 극한 대립으로 정체성이 실종된 채 정쟁에 몰두하게 됐다. 사회는 물량주의와 한탕주의,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이웃을 향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의 문화가 사라져버렸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가 1959년 이후 신사참배의 회개문제와 교회재건을 이유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교세의 확장을 목적으로 정치권과 결탁하며 ‘지성주의’와 ‘성장주의’ 패러다임에 빠지게 됐다. 신학은 사변화되어 교회존재의 본질을 상실한 채 사분오열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교회마저도 각양의 불미스러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한국교회와 연합기관들도 자신들의 이권과 교권다툼에 휘둘려 여럿으로 갈렸다.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선교의 문이 더욱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회복의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희생을 사명으로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땅에 한국교회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복음 촛대의 본질을 회복하며,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제언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로 이룩한 140년 동안 박해의 연단 속에서도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는 숨겨진 저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육·보건·복지·정치·사회·문화 등으로 사회계몽을 이끌어왔고, 우리 사회의 급속한 성장기 저변에는 한국교회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중심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어 왔다. 그러나 성장의 정점에서 풍요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대 사회적인 사명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갈등의 시대에 세상과 소통에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화평케 하지 못해 마치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이 돼버렸다.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기에, 이제 세상의 힘없는 자들의 신음 소리에(사1: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의 절규소리에 반응하는 ‘코람데오’의 심장으로 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현실에 통탄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먼저, 근본적인 복음의 가치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 간 양극화를 초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두번째로 교권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목회자다워야 한다. 목회자는 언행불일치적 삶이 아닌, 거룩한 부담감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 거룩한 일이 시작되는 데에 마중물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예장 백석총회 사무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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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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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
-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 ‘코끼리는 긴튜브’라고 생각하고, 굵은 다리를 만지면,‘코끼리는 통나무와 같다’고 말하며, 몸통을 만지면 ‘코끼리는 넓은 벽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또한, 표류하던 배에 있던 사람이 작은 무인도를 보 면육지로 갈수 있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이 멀리서 표류하다가 흘러오는 배를 보면, 저 배는 나를 구조해 주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각자 보는 관점과 경험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임마누엘칸트는 바로 이와같이 서로 다르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두고‘세계관’이라고 했다. 최근 시리즈로 나오는 몇 영화들이나 소설들, 그리고 최근 회사들의 마케팅에 도자기들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홍보와 판매를 한다. 최근 한국의 편의점들은 각 브랜드마다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가면서, 각 브랜드에 맞는 세계관을은 연중 소비자들에게 심고 있다. 그래서 어느 소비자는 C편의점의 도시락과 빵을 좋아하고, 다른 소비자는 G편의점에서 만맥주와 안주를 구입해서 먹는다. 세계관은 단순히 학문적 분석을 위한 도구를 넘어서 일상에서도 쉽게 접하고 인식할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 세계관의 출발은 구한말 유교문화의 역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조선말기, 철통같은 쇄국정책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부정적 문제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과도한 문치주의로 인한 당파성과 계급적 차별주의, 여성과 어린이의 차별을 제도화하는 가부장적 구조, 맹목적 명령과 복종이 난무하는 효사랑의 강요, 실용적 지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과학적 합리성 부재의 가치관 등이 구한말시대에 600년을 지배해 온 유교문화의 몰락을 이끌었다. 그 빈틈에 개신교 회의 외국선교사들이 자리를 차지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적인 현실을 우리나라에 맛보게 하였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의 땅을 위해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서는 다른 종교인들과도 손을 잡고 하나된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했다. (당파성타파) 또한, 남녀노소의 수백년 고착화된 차별적 구조를 깨기 위해 많은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여성운동의 장을 마련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힘썼다. (차별주의철폐) 봉건적 사회문화 속에서 경직된 학문에 대해서 성경과 외국의 다양한 지식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하고 꿈꾸게 하는 역할(농촌계몽운동, 여성인권운 동, 의료기술의 발달 등)을 하면서, 교회는 그 중심의 자리에서 대한민국을 완전히 변화된 나라로 이끌었다. 그럴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세계관이 유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관점, 특히 세상을 바꾸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큰 역사적 변화를 이뤄냈다. 그때 그 부흥의 힘으로 한국교회는 100년도 채 되지않고 세계선교 2위의 나라까지 성장했고,국가의경제도선진국반열에오르게하는중요한역할을했다. 600년동안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살도록 만든 세계관을 하늘과 하나님을 바라보게하는 변혁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한 것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런데 막 꽃을 피운 한국교회는 100여년 전 멸망했던 유교의 세계관을 좇아가고 있다. 정치에 저급한 훈수를 두는 정교유착된 종교가 되고 있고 기복주의 및 물질만능주의에 빠져교회를 기업처럼 세습하는 것에 윤리적 민감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성적 타락과 재정사고의 만연된 모습은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던 중세교회와 다를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나만 옳다고 맹신하는 배타주의와 나만, 내 교회만, 내 직장만, 내 구원만 이루면된다는 이기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이끌 세계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최근 영화 ‘수리남’, ‘더글로리’, ‘오징어게임’ 등에서 비춰진 추하고 불편한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이제 진흙탕 속에 빠진 기독교세계관을 다시 끄집어 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교회는 희망의 빛이 될수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변화를 넘어 또 다시 개혁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배는 반드시 침몰할 것이고, 다시는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잘못된 길로 가던 발걸음을 옮겨 다시 제대로된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는 생명과 영원의 길을 제시하는 곳이 돼야 한다. 먼저는 혐오와 대결이 아닌 환대와 대화를 이끌고 경쟁과 다툼이 아닌 협력과 화해를 선도하며 개별과 지배가 아닌 공동체와 사귐의 본이 되고 방관과 묵인이 아닌 참여와 책임을, 그리고 인간중심이 아닌 생태와 창조세계중심의 세계관을 내세워 다시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와 기독교가 될 때, 한국교회는 지금의 난관을 이겨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4차 혁명의 AI와 Chat GPT시대 속에서 교회가 이제 더욱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곳이 되어 교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새로운 관점의 부흥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연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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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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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연합의 실천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 한국의 개신교는 장로교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장로교 간판을 달지 않으면 목회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장로교는 한국사람들에게 마치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말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동시에 장로교 하면 교회분열의 역사가 떠오르게 된다. 수도 셀 수 없는 장로교단들은 교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분열의 역사 속에서도 연합을 지향하고 실천하려 했던 피나는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사 안에서 펼쳐진 자랑스런 연합의 발자취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개신교는 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선교되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개신교의 선교(전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교를 두고 네비우스정책에 따라 감리교,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지역을 분할해서 한반도의 선교에 힘썼다. 같은 지역을 두고 경쟁하듯 하는 선교 대신 각자의 영역을 보장해 주는 선에서 상호협력을 기대한 현명한 선교정책이었다. 그러다 1907년 조선에 장로교 첫 노회가 설립되었다. 독노회로 설립된 장로교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모두 참여한 연합된 기구로서 한국에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설립된 것이다. 각각의 장로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피선교지인 한국에 하나의 연합한 장로교를 설립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개신교사에 자랑스런 연합의 정신 그리고 연합의 첫 사례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교회연합의 자랑스런 흔적은 장로교의 교단명칭에서 드러난다. 장로교단들의 공식적인 명칭들을 살펴보면 모두 “대한 예수교 장로회”로 사용하고 그 후에 통합 혹은 합동, 개혁 등의 교단별 명칭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명칭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 안에 장로교단이 지향하는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모든 교회는 사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는 예수교이며 그다음 교단의 특징을 규정하는 교회정치제도가 장로정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장로회라는 말이 뒤따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이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 안에 담긴 뜻은 우리는 모두 장로교 안의 하나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장로회란 이름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교회연합의 정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교단을 절대화하지 않고 모두 예수를 믿는 예수교 안에서 장로교회의 성격을 지닌 장로교인들의 모임으로서의 장로회란 명칭은 자기 교단도 장로교 안에 속한 하나의 모임으로 겸손하게 규정하는 연합의 정신을 표현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개신교사의 또 하나의 자랑스런 연합의 열매를 소개하고자 한다면, 필자가 봉직하는 아신대학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님들이 아신대학교란 이름보다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익숙하게 들어보셨을 줄 안다. 최근에 아신대로 학교명을 바꾸었는데 원래의 교명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였다.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들어갔을까? 아신대는 1974년에 개교한 49년된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신학대학 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매우 특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신대는 한국교회의 각 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신학대학교이다. 아신대가 설립된 1974년 그리고 설립과정 중에 있었던 1960년대는 한국장로교에서 가장 뼈아픈 분열의 시기였다. 합동과 통합이 분열된 시기였고 그 상처를 결국 싸매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열의 시기에 통합과 합동 그리고 고신의 지도자들이 성결교 지도자와 함께 연합해서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신학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선교를 통해 성장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계선교를 위해 아시아 교계지도자들을 초청해서 대학원 수준의 신학교육을 통해 다시 각자의 출신지역으로 파송하기 위해 세워진 선교지향적 신학교육기관이다. 선교의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개신교가 연합해서 세운 신학교육기관인 것이다. 설립 당시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통합의 한철하, 합동의 김의환, 고신의 오병세, 서울신학대의 조종남 박사 등 기라성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빌리 그래함과 사무엘 마펫 등의 미국교회 지도자들과 연합해서 선교 중심의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런 자랑스런 교회연합의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열의 상처 이면에 교회연합의 열매도 자랑스럽게 맺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라기는 통일된 대한민국에서는 분열된 개신교들이 각각의 교단과 신학대학교를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합하는 마음으로 연합신학대학교를 세우고 그로부터 북한을 선교하고 목회를 감당할 교계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신대가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교회연합은 교회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교회분열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죄이다. 그러나 교회연합은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싸매고 치유하는 행동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누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사랑으로 싸매주는 사역인 반면, 사탄의 역사는 성령에 거슬러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하나의 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분열로 치닫게 한다.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올바른 성도들은 마땅히 분별해야 하며 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한 하나됨을 위해 깨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연합의 역사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통일한국의 연합된 한국교회를 꿈꾸어 본다./아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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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연합의 실천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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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진정한 호국
-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기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6월이 왜 호국의 달이 되었는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남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침략을 받았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한을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었지만 남한 입장에서 보면 겨레의 인권을 파괴한 무력 침공일 뿐이었다. 전쟁의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쟁 목적은 성취되지 않았다. 100보를 양보해서 해방전쟁(적화통일)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참담한 비극을 지불하고 이 나라가 통일된다 한들, 그 통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전쟁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 흘린 경험을 가진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증언해야 한다. 전쟁은 무익한 것이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은 예방해야 한다고!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이 공산화가 되더라도 전쟁을 포기하라는 말이냐? 아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휼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역사가 그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1950. 6. 25 – 6.25 발발 1953. 7. 27 – 휴전협정 1972. 7. 4 – 7.4 공동성명 1991. 12. 13 - 남북기본합의서 2000. 6. 15 – 6.15 선언 2007. 10. 4 – 10.4 남북정상선언 2028. 4. 27 – 판문점선언 2018. 9. 19 – 평양공동선언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남과 북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면서 달려왔다. 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남한의 통일정책은 북진통일이었고 그러다가 1974년에 남북 최고 지도자들은 전혀 새로운 3대 통일정책에 합의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그 이후 남북 정상들의 통일 회담은 7·4 성명에서 합의한 3대 통일 원칙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었다. 7·4 공동성명은 남과 북 모두 자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그렇다. 그게 일정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단으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흡수한다는 불멸의 통일 원칙이 자주적, 민족적 역량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이룬 것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열어놓은 평화의 기초가 16년 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었다. 1990. 12월 남북 당국자들은 통일의 과정까지 대략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1단계– 교류협력, 2단계– 남북연합, 3단계- 남북의 평화통일! 이렇게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는 10년 후 드디어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김대중/김정일)들이 만나 통일의 방식과 통일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하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 1항은 자주적 통일원칙을 확인하였고 통일 방안으로서 교류 협력, 남북 연합, 평화적 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구체화 시켰다.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최초로 물꼬를 튼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이론적으로 거의 완전한 설계도를 완성하는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었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제적 실천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남북이 상호 국가적 존엄을 인정하고 통일의 기운을 최고조로 이끈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6·25의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그렇다. 이것이 전쟁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의 보편적 정서였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였다. 1991년에는 남과 북이 서로 묵인하는 가운데 U.N에 동시 가입했고 1990년과 1992년에는 한국전쟁의 실제적 당사자였던 러시아,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혈맹이었던 미국도 한국전쟁에서 적으로 만났던 중국과 일찍이 수교했다. 6·15 정신은 6·25 정신 쇠퇴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환경 변화와 대한민국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알맞게 발전적 성숙을 이룬 것이다. 6·25를 잊지 말자는 호국이 여전히 북한에 대한 증오나 적대감으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대한 이해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상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평화의 기운을 진작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호국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하면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힘이 없어서, 의미 있는 저항 한 번 못 하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참혹한 한국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그때는 힘이 없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이야 무슨 변명이 용납되겠는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협(가능성)은 핵을 보유한 북한에 있지 않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요, 세계가 인정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전쟁 예방 노력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는 준엄한 역사적 단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달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이 샘솟듯 솟아나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평화만이 살길이다. 평화의 사도인 한국교회여, 평화만이 진정한 호국의 길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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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진정한 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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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일반은총에 덜 저항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내려주신다. 그런 은총을 신학자들은 '일반은총'이라고 불러 왔다.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하시는 은총인 특별은총에 비해서, 일반은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쳐지는 은총이다. 그렇기에 일반은총은 구원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세상이 그래도 유지되며 존속해 갈 수 있도록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햇빛과 비를 주시어 만물의 생장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이 세상에 지속하도록 하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일반은총의 손길이 없으면 이 세상은 그저 멸망하고 만다. 믿지 않는 분들은 이 세상이 은혜로 유지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일반은총에 저항한다. 그래서 일반은총을 우리들은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항하는 은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구원하는 은총인 특별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인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이 세상은 일반 은총에 항상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일정한 한도를 넘을 때, 한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노아홍수 때나 바벨탑 사건에서나 소돔과 고모라 등등 여러 곳에서 무수히 보아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간접적 활동의 하나는 이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저항하지는 않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 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푸틴 같은 사람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1년 이상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푸틴의 활동이 일반은총에 지나치게 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이 전쟁이 빨리 마쳐지도록 기도하고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애써야 한다. 마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의 6.25전쟁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했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전쟁 초기에만 관심을 표현했지, 전쟁이 오래가자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사느라고 이 전쟁에 대해서 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일이 많았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반은총 가운데서 이 전쟁이 빨리 끝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 세상에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잘못된 문화의 움직임 같은 것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여 가는 것임을 깊이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런 잘못된 문화적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물론 그렇게 온 세상에서 전쟁이 그쳐서 상대적 평화가 오고, 동성애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세상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사람들이 특별은총과 접촉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로, 진정한 사회로, 진정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천국복음 운동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의 구속사역에 의해서 수립하신 그 하나님 나라에로 중생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런 천국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이끌어 들이는 천국복음운동을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덜 저항하여 가도록 하는 일도 힘써야 한다. 이런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본래적 사역인 천국복음운동의 산물이요 열매이다. 그리하면 간접적으로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힘쓰는 일이 직접적으로는 천국 복음운동이고, 간접적으로는 일반은총에 조금 덜 저항하게 하는 일이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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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일반은총에 덜 저항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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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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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