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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락된 ‘교회 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지금까지 추락된 신뢰도를 회복할 수 없다. 추락된 신뢰도가 지난 한 해동안 ‘코로나19’의 사태 속에서 또다시 추락되어 왔다. 타종교에 비해 ‘코로나19’확산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할 정도로 추락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각 분야에서 위기를 겪고 있지만, 대부분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는 문을 닫았다. 일부 중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대면 예배가 잦아짐에 따라 주일예배를 외면하는 교인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은 70년대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누렸던 물량주의에 편승한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일어 설수가 없다.   ◆‘코로나19’이후의 교회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르지 않은 일부 교회의 잘못된 신앙행태가 한국교회 전체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추락된 신뢰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된 것이다. 사회가 신뢰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교회 스스로 전도의 문을 닫아 버리는 상황이다. 이제는 ‘코로나19’이후의 한국교회 모습을 생각해야 할 시기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다시 일어 설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바른 길과 해답을 찾아야 한다. 복음이 해답이고 기도가 해답이다. 성경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교회신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로 부터 실추된 ‘한국교회 모습’을 ‘사랑의 실천’으로 회복해야 한다. 신뢰도가 추락된 것은 한국교회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바른 모습이란 사랑의 모습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댓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다. 한국교회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에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본지는 56년전 창간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랑의 실천’을 외쳐 왔다. 사랑의 실천으로 실추된 신뢰도를 회복하고, 전도와 선교의 문을 활짝 열수 있다.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국교회가 신뢰도를 회복하려면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곳곳에서 드러난 병리적인 현상은 사회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 왔고,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원인이다. 무엇보다도 깨끗해야 할 교회가 물량주의에 편승하고, 일부 성직자들의 윤리적인 타락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법정에서의 싸움 등은 세속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태가 계속되어 왔다. 그래서 개혁은 시대적 요구이다. 개혁은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아주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 이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연합과 일치로 사회를 선도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계속된 분열로 신뢰도를 추락시켜 왔다. 교인들 간의 싸움으로 교회가 분열하고, 교회간의 싸움으로 노회(지방회)와 교단이 분열되고 있다. 그 분열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교회법보다는 사회법에 의존하는 것이 신뢰도 추락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일반 언론매체는 어떤 사건보다 교회문제를 대서특필해 왔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사회로부터 교회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이고,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분열해 왔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되는 한국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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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1
  • 이웃 사랑을 멈추지 말자
    코로나 장기화로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변하고 있다. 특히 정신장애인과 신체장애인, 치매 환자, 취약가정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제도적, 실질적 지원이 먼저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삶을 위험에서 막고 치료할 사회의 전방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교회에서도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주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가의 말씀(마태복음 22장 37~40절)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며, 이웃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교회의 위선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신랄하게 책망을 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또는 어떤 격식을 위해서 마지못해 사랑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외 이웃의 아픔과 영혼을 함께 사랑하자. 연말연시가 되면 소외된 이웃들은 더욱 소외감을 갖는다. 이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대면 접촉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자체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손길이 더욱 필요하다. 모든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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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자선냄비의 계절이 왔다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을 시작으로 나눔과 돌봄의 겨울이 돌아왔음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1865년 월리엄 부스에 의해 창립된 구세군은 전세계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과 돌봄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그 어느때보다 이웃을 위한 온기가 절실한 때이다. 지난달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진행된 자선냄비 시종식은 코러나19 감염예방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됐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 시기에 주요 지하철 및 거리에서 울리는 자선냄비는 매년 사랑을 실천하는 기부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자선냄비를 통해 모아진 성금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매년 조금씩 감소하던 모금액이 올해는 사회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심해지며 모금의 손길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지하철역사 등 실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자선냄비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줄어들면서 모금액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이에 구세군은 휴대폰으로 QR코드를 찍어 기부하는 비접촉식 기부방식을 활성화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 거리 자선냄비에 QR코드를 설치하고 비대면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온라인 결재 앱 등을 통한 QR 기부도 독려하고 있다.   그동안 연말이면 사회복지단체를 사칭하여 가짜 모금을 해왔던 사람들이 적발된 경우가 종종 생기며 일반 국민들의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수년전에는 구세군 냄비를 사칭한 가짜 냄비가 나타나며 국민들의 불신의 골을 깊게 했다. 그럼에도 올해 코로나사태로 인한 어려움은 소외된 이웃들에게 더욱 힘든 겨울을 나게 할 것이기에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성금기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거리의 자선냄비 뿐 아니라 힘겨운 겨울을 보내는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지역 불우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추운겨울 불우이웃을 돕는 따뜻한 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불우이웃을 위해 작은 정성이라도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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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목회자 이중직 문제 고민해야 한다
    목회자의 수에 비해 목회자에게 안정적인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교회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생계가 보장되는 교회가 아닌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나머지 목회자들의 생계는 심각한 위험을 받고 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그 가정이 겪고 있는 심각한 생계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문제여서 더욱 안타깝다. 먼저 가장 중요한 목회자 수급조절에 모든 개신교단은 완전히 실패했고, 개신교단은 이미 만들어낸 목회자의 생계를 전혀 책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급조절에 실패한 한국 개신교에 여전히 훌륭한 자질과 성품을 갖추고 있는 다수의 목회자들이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목회자로써의 자질과 성품을 갖추고 있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본이 되며 영향력을 끼치기보다는 변방으로 밀려났고, 세습이나 연줄 등의 고리를 이용해 큰 교회를 차지한 애꿎은 목회자들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도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주도하는 한국교회는 사회의 온갖 질타를 받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고, 기독교 생태계는 말 그대로 척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는 목회자 가정이 한둘이 아니다. 교단이 목회자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면, 적어도 목회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은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은 주님의 길을 걷고자 선택한 이후 사역의 길에만 집중한 탓에, 세속에서 직업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것에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한국 개신교는 목회자들을 위해서 진지하게 이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수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나 세속에서나 너무도 값진 인재들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 지금은 목회자 이중직 문제가 타당한지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목회자들이 다양한 직업군에서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도 목회를 병행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이것은 수많은 목회자 가정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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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진정한 교회연합과 일치를 이루자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수한 복음이 사라지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다. 세계교회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순수한 복음이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로 인한 악영향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라오디게아는 ‘백성을 기쁘게 하다’는 뜻인데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현대교회의 모습을 반영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와 기복주의, 성직주의, 복음실종, 제왕적 목회자의 음행과 부도덕, 주술적 성령운동 등으로 표면적으로는 영혼구원을 외치고 있으나 참 교회의 모습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에베소서 1장 22~23절). 교회는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서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체요, 몸이다. 교회는 만물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합된 한 몸이며 일체가 된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다스리며 보존하시는 모든 섭리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건전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전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증거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확증하는 곳이며, 그것을 위해서 성경 진리를 선포하는 곳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연합과 일치를 위한 패러다임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광야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면서 교회를 방해하는 위험요소에 대처해야 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장 8절). 우리는 과거 그리스도인들이 목숨보다 아끼고 지켰던 기본교리, 즉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하나님의 교회의 중요성, 교인의 성화와 성숙,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등 진리를 지키는 데 연합과 일치의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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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추수감사절의 의미 상기하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감사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행사, 곧 하신 일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함이요, 진리로 구원하시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인의 감사 이유가 죄로부터 성별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씀하면서 ‘죽음 이후에도 새 생명으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기보다는 믿음으로 살게 하고 어려움 중에서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타심을 발휘하게 하며 환란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으로 견디게 한다. 이것이 추추감사절의 시작이요 의미이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정착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으나, 기후와 환경에 맞지 않아 첫해에 질병과 기아로 102명 중 47명이나 사망했다. 이듬해인 1921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콩, 보리들을 재배할 수 있었고, 이렇게 거둔 곡식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예배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1904년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   어쨌든 추수의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지고 있다. 은혜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특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 뜻을 받들어 추수의 의미를 알고 주님께 감사하며 이를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한다. 특히 코로나 역병으로 추수감사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위기를 겪고 있지만,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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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1-12
  • 교회는 사회통합에 힘써야 한다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는 미국 사회의 국론분열이 어느 정도로 심한 상황인지를 전 세계에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라는 ‘극우주의자’, 아니 ‘극우주의자’라는 개념으로는 잡히지 않을 만큼 그 이색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미국의 국론은 양분됐고, 조 바이든이 당선 소감을 통해 외친 “분열된 국론을 통합”이라는 아젠다의 성취는 매우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시민 중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트럼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내적으로는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 건설을, 외교적으로는 오직 미국의 이익만을 중요시하는 트럼프의 노선에 찬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의 다수를 기독교인들이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 사회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중심, 미국 중심이라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이기적인 사고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주장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여전히 흑인의 인권을 묵살했고, 동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을 차별했다. 미국의 주인은 자신들이라는 그 거만함은 그에 동조할 수 없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을 자극했고, 결국 미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이 되려 상대를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이 사태. 교회가 어려운 것을 교회 내부의 심각한 타락과 무능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건만, 정부가 탄압해서 교회가 어려워졌다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궤변을 반복하는 사태.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만큼 한국교회는 분열이 아닌 국민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돌아서야만 한다는 조언에 반드시 귀기울이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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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2
  • 건전한 시민의식에 합하는 교회되자
    한 한국사 전문가는 조선 중기부터 명나라에 사대하는 문화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조선은 항시 약소국으로서 주변의 큰 나라에 의존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싹텄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일종의 패배주의는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후 우리 민족은 우리 손으로 직접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결과 해방 이후 남쪽과 북쪽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친일을 하지 않으면 사상검증을 받았던 시절의 악습이 그대로 남아 친미를 하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프레임으로 민중을 억압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기독교가 이러한 프레임 놀이에 앞장섰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흑역사다.    2,000년 전의 대한민국과 2,000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며,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전혀 다르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왔다면 무엇이든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영화가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고, BTS로 대변되는 한류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K-방역은 전 세계의 칭찬을 듣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대한민국의 수준은 세계 어디에서도 뒤처지지 않게 됐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더이상 수동적으로 타인이 시키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타인에 의존하고, 타국에 의지해 살아가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제 스스로 진보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새겨 나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발꿈치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를 막아서고 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한국교회는 반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감히 그 누구도 주장하지 못하는 “나만 옳소”란 아집을 버리고 건전한 시민의식, 다중의식의 진보적 흐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희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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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성령운동 회복이 시급하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단절 상태가 되면서 비대면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웃의 왕래가 막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장차 다가올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시대적 환경이 기존 사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앞으론 새로운 방식의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먼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보혜사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보혜사라는 뜻은 다른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를 말한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요 10:30),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것을 증거한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을 얻는다(고전 12:3).    그러므로 이 시대의 ‘성령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삶의 실제로 살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 9가지의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는 생활이어야 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삶이 성령을 중심한 생활이요, 이를 실체적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참다운 성령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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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한국교회가 사회를 선도하길 기대한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이념적이고 정쟁적인 문제들이 아닌 우리가 대면해 있는 실질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대면한 실질적 문제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후문제란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탄소배출량 저감의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는 유럽연합의 그린딜 정책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1990년부터 2018년까지 경제 규모가 61%나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배출은 오히려 23% 줄었다.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노력의 결과였다. 이에 더해 유럽연합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2050년까지 유럽연합 내에서 탄소 배출 제로라는 더욱 강력한 목표를 담은 그린딜에 정책을 내놓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일찍부터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경제는 언젠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깨달았고,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구조에서 재생 에너지 환경으로 전환 작업을 착수했다. 유럽연합의 그린딜은 이러한 에너지전환의 일환으로 단순한 저탄소 정책만이 아니라, ‘화석연료 이후’ 시대의 새로운 경제정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수 개신교의 반-정부 성향으로 인해, 정부가 시행하는 모든 사안은 반대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억지를 부리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개신교의 문제는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반대 등 여전히 이념·사상적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문제는 그 시급성에서 다른 문제들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기후문제를 인류가 되돌릴 수 있는 임계점이 7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류가 기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찾아올 재능의 형태와 그 규모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교회가 기후문제와 관련한 사회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우리 시민의식을 선도하길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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