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칼럼
-
이순배작가의 「주께서 다시 이 나라를」
이순배작가의 「주께서 다시 이 나라를」 이라는 작품은 이민영작가와 함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의 어려운 세태를 마치 예감이라도 한듯하다. 2023년 9월에 발표 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 출품 되었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계시며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나라에 복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봐도 하나님을 잘 믿는 국가는 흥하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는 못사는 모습을 보아서 이 나라는 반드시 부흥하게 될 영적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
선결제
우리는 꿈꾸는 것 같은 연말연시를 보냈다. 그야말로 초현실적 현실을 지나고 있다. 불의의 비상계엄과 비상착륙이라는 악몽을 실제 상황으로 겪고 있다. 충격과 분노와 슬픔과 고통이 뒤엉킨 시간이다. 무슨 글을 쓴다는 게 참 힘들고, 일손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형국이다. 탄핵 정국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은 아픈 역사와 억울한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 와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있었다. 작가는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에서 평생의 화두와 같은 다음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진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제주 4.3항쟁과 80년 5월 광주의 죽음을 마주한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어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그 아픈 과거를 현재가 치유할 수 있을까? 수학여행 갔던 배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 축제를 즐기려고 나섰던 이태원 거리, 다정한 가족 친지들과 남쪽나라 여행을 다녀오던 무안 공항에서 잃어버린 우리들의 학생, 젊은이, 식구들의 영혼을 마주한다. 형식만 달라졌을 뿐 역사는 반복된다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부터 우리의 민중들이 그랬듯 그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동행하고, 광장에서 거리에서 외치고 또 외치고 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오월 광주 YWCA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 박용준의 글이다.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한강 작가는 이전의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과거에 빚지고 있다. 죽은 자의 선결제를 받았다. 죽은 자들의 선결제를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고,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산 자의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이번 탄핵 시위에서 보여줬던 선결제 문화는 이미 성경에 나왔던 일이었다. 나의 벗님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 박흥순 선생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에서 선결제 이야기를 해주어 공감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준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돌보아줄 것을 부탁한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선뜻 말한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인은 선결제로 자비를 베푼다. 근현대사를 거치며 앞서간 의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선결제가 되어 민주주의 자양분과 한겹 한겹 쌓인 성숙한 시민의식을 이끌어내는 깊은 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마음은 우리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마음이다. 함께 강도 만난 것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움이 어디서 올꼬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곁에 늘 머물며 곁을 내주는 선한 이웃들의 실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결제이다. 광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집회를 주도하는 2030 젊은이들, 특히 여성 청년들의 압도적인 존재와 활약이다. 알록달록 각양각색 빛깔과 목소리를 그대로 담는 '응원봉'과 '선결제'라는 놀라운 문화를 대하게 된다. 아이돌 콘서트나 팬미팅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굿즈나 음식을 나누어주는 팬덤 문화가 탄핵 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작지만 심오한 선결제 행위를 통해 친절과 선의의 연대를 베푸는 오늘의 선린들을 본다. 나 또한 그런 선한 이웃이 되기를 소망한다. 정치적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 선결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영하의 추위 속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베푼 따뜻한 커피, 어묵 꼬치는 단지 따스히 몸 녹이고 시장기를 채우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대는 혼자가 아니며,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그대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였다. 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보내준 벗님들의 어묵트럭은 엄동설한을 녹이고도 남는 사랑 그 자체였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민주 시민 사이의 근본적인 연결, 사람과 사람 간의 선의의 연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언어를 뛰어넘는 서사였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을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견딜 수 없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릅 눈뜨고 직시해야 한다. 젊은 층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은 무색해졌다. 맑고도 진정한 외침과 몸짓, 심각한 이슈를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다른 세대의 에너지와 지혜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비폭력 평화는 빛이 가진 힘을 지녔다. 악다구니 거짓 선동만 무성한 폭력의 낡은 시대가 저무는 걸 목도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야광봉을 흔드는 우리 딸 같은 청년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목사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7) 왕후가 육십이요
6:6 너의 이는 씻는 곳에서 올라온 양떼 같으니, 그 중에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각기 쌍둥이를 낳은 것 같도다. 신부성도의 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아4:2).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정도가 단단한 영적인 음식을 먹는 튼튼한 이가 되고 있음을 칭찬한 것이다. 이가 씻는 곳(목욕장)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늘 말씀으로 깨우침 받아서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말씀으로 심령에 깨우침을 받고 회개하면서 성장하였고, 이제는 말씀을 증거하여 새끼를 낳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새끼를 낳는 것마다 쌍둥이를 낳는다. 쌍둥이는 두 증인을 계시한다. 우리의 신앙이 먼저 두 증인의 신앙에 서 있으면 이러한 두 증인 같은 환란 날의 하나님 종들을 낳는 튼튼한 이를 가진 자가 된다. 6:7 네 뺨은 네 머리타래 안에서 석류 한 쪽 같도다. 석류를 반으로 쪼개면 빨간 씨들이 총총히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씨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뺨은 얼굴을 가리키는데, 온몸으로 이룬 모든 영광이나 몸의 상태는 얼굴에 나타난다. 신부성도의 얼굴이 석류 한쪽 같다는 것은 석류의 씨같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 맺는 생명으로 충만한 신부성도의 모습을 칭찬하시는 것이다. 6:8 왕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이요 처녀들은 셀수도 없으나 왕후는 왕의 부인으로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아내를 가리킨다. 왕후는 왕의 분깃을 이어 받는 자이다. 앞으로 있을 7년 환란 날에 순교케 하여 주의 재림의 때에 첫째 부활시켜 혼인식에 참여하게 될 대상들이다. 왕후가 60명이라고 했는데 이는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수가 있는데(계 6:11, 7:9) 왕후가 될 자들은 모두 순교를 통하여 주의 재림 때에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후궁은 왕의 첩이다. 그녀는 왕의 분깃을 이어 받는 왕후는 아니지만 왕을 경험하는 자이다. 즉 후궁은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니고 휴거성도를 가리킨다. 이들은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에서 보호 양육을 받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휴거를 통해서 주님을 맞이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종자백성이 되는 것이다. 또 처녀는 왕을 경험하지 못하는 시녀를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드는 천군천사들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들과 예비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고,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 등을 시녀들이 하였다.6:9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않은 이는 오직 하나요,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며 그녀를 낳은 어머니의 귀한 사람이라. 딸들이 그녀를 보고 그녀를 축복하니, 정녕, 왕후들과 후궁들과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하는도다.‘나의 비둘기’는 신부성도를 가리키는데 특히 제일 앞서있는 십사만 사천명을 가리킨다. 비둘기 같이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음녀나 어떤 세상적인것, 잘못된 신앙으로 유혹하는데서 휩쓸리지 않고 있는 신부성도이다. 또 비둘기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도 빼앗아 갔다고 한 것처럼 주님의 고난의 길을 똑같이 기쁘게 달려온 신앙안목을 가진 자이기에 ‘나의 비둘기’라고 호칭한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며 온전한 자는 계14:4~5에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다. 주의 재림 때에 신부로서 가장 영광이 앞선 자가 십사만 사천명 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온전한 신부는 오직 하나요’ 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두 개가 있으면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오직 하나이기에 어디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람이며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성서와 생활 [55회] 그리스도인의 삶- 범사의 아름다움
성도의 선함은 어느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자녀들이 범사에 선하기를 바라신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골1:10) 하는 삶의 주인공들이다. 주일날이나 특정예배시간만이 믿음 중심으로 사는 것을 뛰어 넘는 삶을 원하신다. 특별한 주일 날만이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시간으로 훈련받을 수 있다. 주일날 만큼은 거룩히 구별하여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마자 방송매체인 tv를 틀고 세상 즐거움에 빠지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훈련들은 영적인 흐름에 따라 점점 자신의 삶을 거룩히 구별하게 된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오락이나 다른 쾌락에 빠지는 일까지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주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임을 더욱 분별하게 되어 교회에 헌신하는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헌신을 사모하는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된다. 자신을 기쁘게하는 삶이 된다면 자신의 보호와 편리와 안위만을 염려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의 기회는 특정한 날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님 중심의 삶이 된다면 모든 날에 선한 일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열매가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보다 더 크고 완전한 생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신다. 범사에 모든 일을 주님을 의지하여 선을 도모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옳은 일을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범사에 하나님 중심. 주님 중심으로 깨어 있게하신다. 선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체험하여 능력으로 행하게 하신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광의 힘을 따라 범사에 선한 중심으로 세움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받은 기업이며 생명이다. 우리의 날은 모든 날이 주님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사랑하게 해 주신다. 이 거룩한 희생에는 특별한 견딤과 오래 참음의 인격을 낳게 하신다. 이러한 삶이 가능하도록 ‘합당’(골1:12)하게 이끌어 주신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선한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옳은 행실로 덧입혀 주신다. 이러한 삶을 허락받은 주의 성도들은 주를 향한 감사의 문이 열리게 된다. 주의 선함이 범사에 나의 선함이 되게 하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신년메세지] 주님을 복의 통로로 삼는 성도가 되자
2024년을 시작하면서 많은 기대 가운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다사다난한 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성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2025년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복의 통로로 삼아야 살 수 있음을 고백하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만을 복의 근원으로 알고 이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복된 성도가 되자.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는 고백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요 모든 것이 되신다는 절대신앙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신앙)과도 동일하다. 이런 신앙은 주를 섬기는 것을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로 느끼게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복의 근원으로 적용할 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下-3)고 한다. 또한, 이 땅에서 존귀한 자인 성도들과 복된 교제를 하다.“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고백하는 성도를 볼 때 하나님의 가족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가족에게 고백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신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성도는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시요,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기쁨이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바른 성도의 교제가 나타날 때 “내 복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나에게 행복이란 없고 하나님보다 더 선이나 행복은 상상할 수도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산업과 나의 소득과 나의 분깃을 지켜 주신다(시 16:5). 나아가 성도에게 허락한 곳을 아름답게 하신다(시 16:6)는 말씀은 새로운 해를 살아가야 할 성도에게 기대하며 살도록 하심에 감사의 요건이 된다. 성도에게 영원한 삶을 소망하도록 하신 은혜는 나보다 더 행복하거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2025년 주님을 복의 통로로 삼아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하는 성도가 되자. /서울한영대 총장·목사
-
[2025년도 국외교회 전망] 평화와 정의를 향한 사명감당 주력
신앙과 실천으로 ‘창조세계’ 지키는 데에 앞장 전쟁과 분규상황을 공유하며 함께 기도하고 세계교회의 기도와 소망 전세계 532개 교단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과 분규 상황을 공유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 제목을 나누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규탄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 유산과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중동, 수단, 콜롬비아, 한국,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지역에서 평화를 위하여 지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에 맞서 대담하게 캠페인을 벌이고, 더욱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고, 공정한 금융 구조를 설계하며, 다른 전통과의 종교 간 이해와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폭넓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한국에서 일어난 비상계엄 소식을 신속하게 전하고 기도로 함께 해준 세계교회의 연대를 보면서 감사하면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사람들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행복한 절기에 예수님이 돌보셨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형편을 나누고 세계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창조 세계 파괴를 끝내야 2025년을 맞으며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의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비롯하여 필리핀과 미얀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나이지리아에서 크고 작은 전쟁과 인권유린이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에 여전히 냉전 시대의 유산이 확대재생산 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실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전한 천사들의 찬송이 무색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땅의 평화를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만들어갈 사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다. 전쟁과 분쟁 지역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기도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함께 기도하고, 각 나라의 정부들이 자국의 평화를 넘어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전쟁과 함께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이 창조 세계의 파괴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와 대응은 이미 사회 모든 분야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세상에서 기후 위기를 인류의 생존과 지구의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면 교회는 창조 세계의 보전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창조신앙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안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실천을 성경의 증언을 삶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에서 채택한 “살아있는 지구 :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글로벌 공동체를 향한 추구”(The Living Planet: Seeking a Just and Sustainable Global Community) 문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문서는 “우리는 계속되는 인간의 이기심, 탐욕, 사실의 부정, 그리고 무관심으로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창조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우리의 실질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문서는 구체적인 자료와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기후 위기 시대 교회의 신앙적 응답을 보여준다. 이 문서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회원교회들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논의와 실천의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창조신앙에 근거한 신앙과 실천으로 세계교회와 함께 창조 세계를 지켜가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시대를 열어야 2025년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세계교회는 중요한 논의와 결정을 시작한다. 특히 교회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사건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해석과 전망을 하게 된다. 교회사에서 처음 공의회로 기록된 니케아공의회 천 칠백 주년,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에 제동을 걸었던 베를린회의 140주년, 세계 에뮤 캐니 칼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던 삶과 봉사 창립 100주년, 제4차 여성대회와 북경 선언 30주년을 기념하고 돌아보는 대회들이 열린다. 6월에 열리는 중앙위원회는 2030년 열리는 제12차 총회의 개최지 신청을 받고 준비위원회 조직을 시작한다. 놀라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변화와 발전에 응답하는 교회의 숙고와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25년을 “에큐메니칼의 해”로 명명하고 있다. 진정한 연대와 일치의 정신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은혜를 전하는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평화와 정의를 향한 교회의 소명 서두에 소개한 세계교회협의회 성탄절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올해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우리 세상에 공의롭고 의로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희망하며, 일해 나갑시다. 때로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평화의 왕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온전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 깨달음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투쟁과 고통 속에서 희망과 기쁨, 그리고 힘이 되기를 바라며, 세상에 기쁨을 가져다 주기 바랍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우리의 축제로 고양되고 새롭게 되어, 평화의 길을 걸으며 우리 시대와 세상에서 그 약속을 실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물로 주신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하는 우리의 소망과 결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 안에서 약한 자들을 돕고, 평화와 정의를 이루게 하실 것을 믿는다. /WCC 중앙위원·동인교회 목사
-
-
이순배작가의 「주께서 다시 이 나라를」
- 이순배작가의 「주께서 다시 이 나라를」 이라는 작품은 이민영작가와 함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의 어려운 세태를 마치 예감이라도 한듯하다. 2023년 9월에 발표 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 출품 되었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계시며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나라에 복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봐도 하나님을 잘 믿는 국가는 흥하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는 못사는 모습을 보아서 이 나라는 반드시 부흥하게 될 영적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이순배작가의 「주께서 다시 이 나라를」
-
-
선결제
- 우리는 꿈꾸는 것 같은 연말연시를 보냈다. 그야말로 초현실적 현실을 지나고 있다. 불의의 비상계엄과 비상착륙이라는 악몽을 실제 상황으로 겪고 있다. 충격과 분노와 슬픔과 고통이 뒤엉킨 시간이다. 무슨 글을 쓴다는 게 참 힘들고, 일손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형국이다. 탄핵 정국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이어지는 작금의 현실은 아픈 역사와 억울한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 와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있었다. 작가는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에서 평생의 화두와 같은 다음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진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제주 4.3항쟁과 80년 5월 광주의 죽음을 마주한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어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그 아픈 과거를 현재가 치유할 수 있을까? 수학여행 갔던 배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 축제를 즐기려고 나섰던 이태원 거리, 다정한 가족 친지들과 남쪽나라 여행을 다녀오던 무안 공항에서 잃어버린 우리들의 학생, 젊은이, 식구들의 영혼을 마주한다. 형식만 달라졌을 뿐 역사는 반복된다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부터 우리의 민중들이 그랬듯 그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동행하고, 광장에서 거리에서 외치고 또 외치고 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오월 광주 YWCA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 박용준의 글이다.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한강 작가는 이전의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과거에 빚지고 있다. 죽은 자의 선결제를 받았다. 죽은 자들의 선결제를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고,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 산 자의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다. 이번 탄핵 시위에서 보여줬던 선결제 문화는 이미 성경에 나왔던 일이었다. 나의 벗님 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 박흥순 선생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에서 선결제 이야기를 해주어 공감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준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돌보아줄 것을 부탁한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선뜻 말한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인은 선결제로 자비를 베푼다. 근현대사를 거치며 앞서간 의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선결제가 되어 민주주의 자양분과 한겹 한겹 쌓인 성숙한 시민의식을 이끌어내는 깊은 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마음은 우리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마음이다. 함께 강도 만난 것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움이 어디서 올꼬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곁에 늘 머물며 곁을 내주는 선한 이웃들의 실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결제이다. 광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집회를 주도하는 2030 젊은이들, 특히 여성 청년들의 압도적인 존재와 활약이다. 알록달록 각양각색 빛깔과 목소리를 그대로 담는 '응원봉'과 '선결제'라는 놀라운 문화를 대하게 된다. 아이돌 콘서트나 팬미팅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굿즈나 음식을 나누어주는 팬덤 문화가 탄핵 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작지만 심오한 선결제 행위를 통해 친절과 선의의 연대를 베푸는 오늘의 선린들을 본다. 나 또한 그런 선한 이웃이 되기를 소망한다. 정치적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 선결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영하의 추위 속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베푼 따뜻한 커피, 어묵 꼬치는 단지 따스히 몸 녹이고 시장기를 채우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대는 혼자가 아니며,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그대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였다. 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보내준 벗님들의 어묵트럭은 엄동설한을 녹이고도 남는 사랑 그 자체였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민주 시민 사이의 근본적인 연결, 사람과 사람 간의 선의의 연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언어를 뛰어넘는 서사였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을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견딜 수 없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릅 눈뜨고 직시해야 한다. 젊은 층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은 무색해졌다. 맑고도 진정한 외침과 몸짓, 심각한 이슈를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다른 세대의 에너지와 지혜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비폭력 평화는 빛이 가진 힘을 지녔다. 악다구니 거짓 선동만 무성한 폭력의 낡은 시대가 저무는 걸 목도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야광봉을 흔드는 우리 딸 같은 청년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선결제
-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7) 왕후가 육십이요
- 6:6 너의 이는 씻는 곳에서 올라온 양떼 같으니, 그 중에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각기 쌍둥이를 낳은 것 같도다. 신부성도의 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아4:2).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정도가 단단한 영적인 음식을 먹는 튼튼한 이가 되고 있음을 칭찬한 것이다. 이가 씻는 곳(목욕장)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늘 말씀으로 깨우침 받아서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말씀으로 심령에 깨우침을 받고 회개하면서 성장하였고, 이제는 말씀을 증거하여 새끼를 낳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새끼를 낳는 것마다 쌍둥이를 낳는다. 쌍둥이는 두 증인을 계시한다. 우리의 신앙이 먼저 두 증인의 신앙에 서 있으면 이러한 두 증인 같은 환란 날의 하나님 종들을 낳는 튼튼한 이를 가진 자가 된다. 6:7 네 뺨은 네 머리타래 안에서 석류 한 쪽 같도다. 석류를 반으로 쪼개면 빨간 씨들이 총총히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씨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뺨은 얼굴을 가리키는데, 온몸으로 이룬 모든 영광이나 몸의 상태는 얼굴에 나타난다. 신부성도의 얼굴이 석류 한쪽 같다는 것은 석류의 씨같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 맺는 생명으로 충만한 신부성도의 모습을 칭찬하시는 것이다. 6:8 왕후가 육십이요 후궁이 팔십이요 처녀들은 셀수도 없으나 왕후는 왕의 부인으로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아내를 가리킨다. 왕후는 왕의 분깃을 이어 받는 자이다. 앞으로 있을 7년 환란 날에 순교케 하여 주의 재림의 때에 첫째 부활시켜 혼인식에 참여하게 될 대상들이다. 왕후가 60명이라고 했는데 이는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수가 있는데(계 6:11, 7:9) 왕후가 될 자들은 모두 순교를 통하여 주의 재림 때에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후궁은 왕의 첩이다. 그녀는 왕의 분깃을 이어 받는 왕후는 아니지만 왕을 경험하는 자이다. 즉 후궁은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니고 휴거성도를 가리킨다. 이들은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에서 보호 양육을 받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휴거를 통해서 주님을 맞이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종자백성이 되는 것이다. 또 처녀는 왕을 경험하지 못하는 시녀를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드는 천군천사들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들과 예비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고,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 등을 시녀들이 하였다.6:9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않은 이는 오직 하나요,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며 그녀를 낳은 어머니의 귀한 사람이라. 딸들이 그녀를 보고 그녀를 축복하니, 정녕, 왕후들과 후궁들과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하는도다.‘나의 비둘기’는 신부성도를 가리키는데 특히 제일 앞서있는 십사만 사천명을 가리킨다. 비둘기 같이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음녀나 어떤 세상적인것, 잘못된 신앙으로 유혹하는데서 휩쓸리지 않고 있는 신부성도이다. 또 비둘기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도 빼앗아 갔다고 한 것처럼 주님의 고난의 길을 똑같이 기쁘게 달려온 신앙안목을 가진 자이기에 ‘나의 비둘기’라고 호칭한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며 온전한 자는 계14:4~5에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했다. 주의 재림 때에 신부로서 가장 영광이 앞선 자가 십사만 사천명 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온전한 신부는 오직 하나요’ 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두 개가 있으면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오직 하나이기에 어디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람이며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47) 왕후가 육십이요
-
-
성서와 생활 [55회] 그리스도인의 삶- 범사의 아름다움
- 성도의 선함은 어느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자녀들이 범사에 선하기를 바라신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골1:10) 하는 삶의 주인공들이다. 주일날이나 특정예배시간만이 믿음 중심으로 사는 것을 뛰어 넘는 삶을 원하신다. 특별한 주일 날만이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시간으로 훈련받을 수 있다. 주일날 만큼은 거룩히 구별하여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마자 방송매체인 tv를 틀고 세상 즐거움에 빠지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훈련들은 영적인 흐름에 따라 점점 자신의 삶을 거룩히 구별하게 된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오락이나 다른 쾌락에 빠지는 일까지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주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임을 더욱 분별하게 되어 교회에 헌신하는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헌신을 사모하는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된다. 자신을 기쁘게하는 삶이 된다면 자신의 보호와 편리와 안위만을 염려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의 기회는 특정한 날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님 중심의 삶이 된다면 모든 날에 선한 일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열매가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보다 더 크고 완전한 생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신다. 범사에 모든 일을 주님을 의지하여 선을 도모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옳은 일을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범사에 하나님 중심. 주님 중심으로 깨어 있게하신다. 선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체험하여 능력으로 행하게 하신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광의 힘을 따라 범사에 선한 중심으로 세움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받은 기업이며 생명이다. 우리의 날은 모든 날이 주님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사랑하게 해 주신다. 이 거룩한 희생에는 특별한 견딤과 오래 참음의 인격을 낳게 하신다. 이러한 삶이 가능하도록 ‘합당’(골1:12)하게 이끌어 주신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선한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옳은 행실로 덧입혀 주신다. 이러한 삶을 허락받은 주의 성도들은 주를 향한 감사의 문이 열리게 된다. 주의 선함이 범사에 나의 선함이 되게 하셨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55회] 그리스도인의 삶- 범사의 아름다움
-
-
[신년메세지] 주님을 복의 통로로 삼는 성도가 되자
- 2024년을 시작하면서 많은 기대 가운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다사다난한 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성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2025년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복의 통로로 삼아야 살 수 있음을 고백하는 새해가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먼저, 하나님만을 복의 근원으로 알고 이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복된 성도가 되자.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는 고백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요 모든 것이 되신다는 절대신앙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신앙)과도 동일하다. 이런 신앙은 주를 섬기는 것을 의무라기보다는 권리로 느끼게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복의 근원으로 적용할 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下-3)고 한다. 또한, 이 땅에서 존귀한 자인 성도들과 복된 교제를 하다.“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고백하는 성도를 볼 때 하나님의 가족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가족에게 고백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신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성도는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시요,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기쁨이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바른 성도의 교제가 나타날 때 “내 복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나에게 행복이란 없고 하나님보다 더 선이나 행복은 상상할 수도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산업과 나의 소득과 나의 분깃을 지켜 주신다(시 16:5). 나아가 성도에게 허락한 곳을 아름답게 하신다(시 16:6)는 말씀은 새로운 해를 살아가야 할 성도에게 기대하며 살도록 하심에 감사의 요건이 된다. 성도에게 영원한 삶을 소망하도록 하신 은혜는 나보다 더 행복하거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없음을 확인하게 한다. 2025년 주님을 복의 통로로 삼아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하는 성도가 되자. /서울한영대 총장·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신년메세지] 주님을 복의 통로로 삼는 성도가 되자
-
-
[2025년도 국외교회 전망] 평화와 정의를 향한 사명감당 주력
- 신앙과 실천으로 ‘창조세계’ 지키는 데에 앞장 전쟁과 분규상황을 공유하며 함께 기도하고 세계교회의 기도와 소망 전세계 532개 교단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과 분규 상황을 공유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 제목을 나누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규탄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 유산과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중동, 수단, 콜롬비아, 한국,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지역에서 평화를 위하여 지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에 맞서 대담하게 캠페인을 벌이고, 더욱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고, 공정한 금융 구조를 설계하며, 다른 전통과의 종교 간 이해와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폭넓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한국에서 일어난 비상계엄 소식을 신속하게 전하고 기도로 함께 해준 세계교회의 연대를 보면서 감사하면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사람들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행복한 절기에 예수님이 돌보셨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형편을 나누고 세계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창조 세계 파괴를 끝내야 2025년을 맞으며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의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비롯하여 필리핀과 미얀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나이지리아에서 크고 작은 전쟁과 인권유린이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에 여전히 냉전 시대의 유산이 확대재생산 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실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전한 천사들의 찬송이 무색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땅의 평화를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만들어갈 사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다. 전쟁과 분쟁 지역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기도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함께 기도하고, 각 나라의 정부들이 자국의 평화를 넘어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전쟁과 함께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이 창조 세계의 파괴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와 대응은 이미 사회 모든 분야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세상에서 기후 위기를 인류의 생존과 지구의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면 교회는 창조 세계의 보전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창조신앙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안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실천을 성경의 증언을 삶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에서 채택한 “살아있는 지구 :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글로벌 공동체를 향한 추구”(The Living Planet: Seeking a Just and Sustainable Global Community) 문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문서는 “우리는 계속되는 인간의 이기심, 탐욕, 사실의 부정, 그리고 무관심으로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창조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우리의 실질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문서는 구체적인 자료와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기후 위기 시대 교회의 신앙적 응답을 보여준다. 이 문서는 세계교회협의회와 회원교회들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논의와 실천의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창조신앙에 근거한 신앙과 실천으로 세계교회와 함께 창조 세계를 지켜가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시대를 열어야 2025년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세계교회는 중요한 논의와 결정을 시작한다. 특히 교회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사건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해석과 전망을 하게 된다. 교회사에서 처음 공의회로 기록된 니케아공의회 천 칠백 주년,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에 제동을 걸었던 베를린회의 140주년, 세계 에뮤 캐니 칼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던 삶과 봉사 창립 100주년, 제4차 여성대회와 북경 선언 30주년을 기념하고 돌아보는 대회들이 열린다. 6월에 열리는 중앙위원회는 2030년 열리는 제12차 총회의 개최지 신청을 받고 준비위원회 조직을 시작한다. 놀라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변화와 발전에 응답하는 교회의 숙고와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25년을 “에큐메니칼의 해”로 명명하고 있다. 진정한 연대와 일치의 정신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은혜를 전하는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평화와 정의를 향한 교회의 소명 서두에 소개한 세계교회협의회 성탄절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올해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우리 세상에 공의롭고 의로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희망하며, 일해 나갑시다. 때로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평화의 왕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온전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 깨달음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투쟁과 고통 속에서 희망과 기쁨, 그리고 힘이 되기를 바라며, 세상에 기쁨을 가져다 주기 바랍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우리의 축제로 고양되고 새롭게 되어, 평화의 길을 걸으며 우리 시대와 세상에서 그 약속을 실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물로 주신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하는 우리의 소망과 결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세상 안에서 약한 자들을 돕고, 평화와 정의를 이루게 하실 것을 믿는다. /WCC 중앙위원·동인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2025년도 국외교회 전망] 평화와 정의를 향한 사명감당 주력
실시간 칼럼 기사
-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0) 그의 어가를 보라
- 연기 기둥과 같이, 몰약과 유향의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분이시여!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만왕의 왕·만주의 주이시여! 그분이 나의 남편이 되시도다. 3:7 그의 침상을 보라, 그것은 솔로몬의 것이로다. 이스라엘의 용사 중에서 육십 명의 용사가 그것을 호위하였는데‘그의 침상을 보라’는 것은 실제로 잠자는 침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6절에서 연기 기둥같이, 몰약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분, 즉 재림하시는 주님을 보라는 것이다. 그의 침상은 9~10절에 금과 은으로, 레바논 나무로 만든 병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7절의 그의 침상과 9절의 병거는 똑같은 것이다. 왕이 행차할 때 타는 화려한 수레(어가)이다. 이는 신랑 예수님이 영광중에 찬란하게 오시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침상을 보라’는 것은, 곧 그의 어가(御駕)를 보라는 것과 같다. 아가서1,2장을 거쳐 3장에 이른 신부 성도는 자기 남편인 다시 오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얼마나 찬란하게 행차하시는 가를 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솔로몬의 것이로다.’라고 하신다. 이는 실제 사람인 과거 솔로몬 왕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왕좌인 솔로몬의 왕위를 계시한 것이다. 마치 마1:1에 예수님의 족보에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것과 같다. 실제로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었다. 예수님은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 다윗의 주가 되신다. 따라서 다윗 왕은 그림자이고 실상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것을 예표로 계시하여 ‘다윗의 아들이다.’라고 한 것이다. ‘평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주변나라로부터는 조공을 받으며 영화를 누린 왕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영광과 권능으로 다시 오실 것을 계시한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가서는 솔로몬이 신부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임을 깨달았다. 그가 신부성도의 자리에서 또 주님을 남편으로 모시며 찬양하는 노래이다. 또 남편이 되시는 주님이 자기를 데리러 오시는 것을 영안으로 보며 노래하고 있다. 신부성도인 솔로몬에게 예수님이 그의 남편으로 영광중에 행차하시는 것이다. <롯기서>는 룻이 솔로몬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인 보아스 신랑과 결혼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요컨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은 임금님의 어가처럼 화려하고 찬란하게 영광가운데 오신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의 것, 즉 그리스도의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용사 중에서 60명의 용사가 호위하는 도다.’이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함께 오는 무리들을 계시한다. 이들은 천사들을 지칭한 것인가? 아니면 부활하여 함께 오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지칭하는가? 성경에서 천사들을 이스라엘이라 호칭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 이스라엘로 호칭한다. 그러므로 주 재림 시 부활하여 함께 오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60명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또 아6:8에 왕후가 육십이라고 하였다. 솔로몬 왕의 부인이 60명이라는 말씀은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부인이 60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재림하실 예수님의 왕후 60명은 첫째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부를 계시한다. 이는 계19:14에 주님과 함께 오는 흰옷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천사가 아니다. 이들은 바로 7년 대 환란 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순교한 자들로서 주 재림 시 첫째 부활한 자들이다. 이들이 곧 그리스도의 신부이다(계19:8,14). 그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 이 흰옷은 계6:11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죽임당한 자들에게 입혀주시는 옷을 가리킨다. 종말에 사는 우리가 바로 그 60명의 용사 중에 들어가야만 복된 자가 된다. 따라서 이 60명의 용사는 한정된 숫자가 아닌 상징 수이다. 즉 수많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임을 계시한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0) 그의 어가를 보라
-
-
성서와 생활 [28] 그리스도인의 영성 어린이의 영성
- 인류는 18세기에 인간을 발견하고 19세기에는 여자를 발견한다. 20세기에 와서 인류 최대의 발견은 어린이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자각이 늦어진 반면 기독교 안에서 어린이에 대한 발견은 이미 2천 년 전에 있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천국의 주인이다.막10:14 주님께서 어린이를 천국의 주인으로 그 가치를 부여하셨다.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마18:5이라고 하셨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기독교의 가치관 위에 어린이를 천국의 유업자로 세우는 사명을 가정과 교회에 맡기셨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기 때문에 심령이 강하여지도록,눅1:8 양육해야한다. 천국의 씨인 어린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양육받아야 한다. 만약 성경적 가르침을 소홀히 한다면 어린이의 존엄성을 크게 해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딤전3:16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신의 성품에 참여할 온전한 유업자의 길이다, 자식은 하나님 주신 기업,시127:3이며 축복이며 선물이다.시128:3 우리 자녀가 주님의 축복을 받아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인도해야한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아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주님께서 안수하여주시고막10:16안아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게 했다. 인간의 정서 중 가장 큰 사랑의 근원인 예수님을 알게하였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인간의 가장 큰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가장 큰 교육이다. 이러한 사명을 잘 이행하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세계인구 2%에 불과 하지만 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민족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을 암기하도록 교육시키는 일을 철저히 하고 있다.신4:9-14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아한다. 십지가의 구속의 사건과 십자가의 정신과 생명을 소유하도록 해야한다.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구원을 예배하는 자로 세워야한다. 어린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체임을 발견하도록 신앙으로 돌봐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최대의 축복이며 세상에서도 머리가 됨을 아는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28] 그리스도인의 영성 어린이의 영성
-
-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사역
- 교회는 존재하지만 기독교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제자를 낳아야 하는데 제자를 낳지 못하는 불임 기독교인이 대부분인 현실이다. 그만큼 기독교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잃은 채 세상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선도해야 할 교회와 구성원들이 방향성을 잃어버린 가운데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의 종말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독교 역사를 경험하고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종말의 징조를 체험하고 있다. 영적으로 볼 때 지금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이에 기독교인은 시대를 선도하는 선지자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세상에 대해 빛을 발하고 증거해야 할 사명감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위해 부름 받은 사역자 근래 기독교의 모습을 볼 때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사역은 나름대로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의 울타리 너머의 대한 사역과 관심을 생각해보면 많이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비해 세상으로 대변되는 울타리 밖에 대한 사역을 보면 이렇다 내세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나름으로 교회 안에서 말씀 훈련을 받고 뜨거운 교제도 이루는데 비해서 과연 세상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어떠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모름지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변합기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신앙인으로 역할을 한다면 주님이 그들을 부르신 의도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열 두 명의 제자들과만 교제한 다음 홀연히 사라졌다면 과연 그분이 인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러나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희생하셨기에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주님이 남기신 교훈을 보면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섬겼던 것처럼 세상을 섬기라는 것으로서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인의 사역의 대상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결단코 세상의 유행이라는 미신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지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물질문명과 첨단 정보의 발달로 인한 온갖 미신의 홍수에 빠져들고 있다. 학문과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한 수많은 가치관들이 사람들의 혼을 지배하다 못해 세뇌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가운데 세상을 위해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세상의 유행이라는 미신을 좇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의 넓고 편리하고 쉬운 길에 미련 두지 말고 좁고 어려우며 고난의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바울이 딤후 2:8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세상이 주는 핍박도 달게 받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며 증인 된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역의 핵심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1세기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그들의 관심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억압하던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있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봉하던 ‘의’라는 것도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하는 노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하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어느 민족보다도 대단한 자부심으로 살았던 그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들에게 교훈 하려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그분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가치인 산상수훈을 통해서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예전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 가운데 살았지만 이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는 곧 세상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함으로 그들을 구할 수 있도록 관계를 이루라는 말로서 기독교인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분명한 사역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서 불려 나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 이러한 사명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면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여전히 세상에 묶여 있었을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누렸으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으로 복음의 역사에 크나큰 걸림돌로 존재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자신들과 원수 되어 있는 세상까지도 사랑함으로 세상을 구하는데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사역은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고통이 되었던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견디고 인내함으로 완성할 사역 세상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사실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에의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이유도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고 있는데 이에 사역자는 견디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사역은 각자의 형편이나 직분이나 능력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을 초월하는 자세와 사명감으로 사역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은 이에 대해 고전 1:8을 통해서 확신의 말씀을 주신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님은 사역의 여정에 힘과 지혜를 주시며 어려울 때 위로와 도우심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힘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기독교인에게 맡겨주신 사역은 실로 방대하면서도 놀라운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 역병으로 인해서 역사의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는 인류의 운명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당시보다 복음에 대해 더욱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복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흑암의 세력이 사방에서 준동하는 현실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인이 세상을 대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참고 견디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향한 것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할 기독교인의 사역은 각 사람의 용기와 헌신과 인내를 통해서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순회선교사
-
- 오피니언
- 칼럼
-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사역
-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9) 연기기둥 같이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 신부 성도에게 은혜 베푸시는 신랑 예수님을 노루와 사슴에 비유하신다. 이는 내 속에 그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리된다면 내가 나가서 그분을 자랑하며 증거하리라. 이렇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노루와 들 사슴 같다는 것이다. 3:6 연기기둥과도 같이, 몰약과 유향과 상인들의 모든 향료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5절까지 남편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신부 성도의 심령에 아구까지 충만하게 채워진 이후가 6절이다. 그래서 그분은 내게 연기 기둥과도 같이 오신다고 말씀한 것이다. 연기 기둥은 무엇인가? 구름 기둥을 가리킨다. 연기가 자욱하면 구름 기둥이 되는 것이다. 출1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또 성막을 지었을 때(출40장)와 솔로몬 성전을 지었을 때(대하5:13~14)에도 성전 안에 구름이 가득했다. 그리고 계15:8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찼다고 했다. 연기, 즉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연기 기둥과 같이 광야에서 오시는 것은 영광의 주님이 영광스럽게 내게 오신다는 말씀이다. 또 몰약과 유향과 향료로 향내를 내며 오시는 분이 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향료로써 죽음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몰약 향내를 내며 오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즉 영원 속죄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몰약 향이다. 또 유향은 기도를 의미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된다.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거룩한 성전이 된 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한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응답하실 뿐만아니라 나를 온전케 해 주신다. 나를 온전케 하시는 것은 결국은 신부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부 신앙에 서 있는 나를 데리러 오시는 분이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과 모든 향료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신랑 예수님이다. ‘광야에서 오시는 이’는 신랑 예수님이다. 여기서 광야는 짐승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연기기둥과 같이 영광중에 오실 때 광야의 짐승들이 대적한다. 짐승 중에 우두머리는 적그리스도요, 다음은 거짓 선지자와 그와 함께하는 음녀 교회들과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해당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지고 아마겟돈 전쟁이 있다(16:12이하). 그때에 짐승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인다. 즉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땅의 왕들이 모여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때 주님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들을 멸하고 재림하신다(계 19:14~21). 이렇게 연기기둥과 같이, 몰약과 유향의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시는 분은 내 남편이고 만왕의 왕·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시다. 아가서는 요한계시록을 깨닫고 난 후에 상고해야 수월하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아가서를 먼저 깨달았고 그 후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요한계시록을 남겼다. 오늘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가서를 증거 받아도 확인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반대로 계시록을 먼저 깨달은 후에 아가서를 상고하니까 쉽게 소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9) 연기기둥 같이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
-
성서와 생활 [27] 그리스도인의 영성- 아버지(들림)의 영성
-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다.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임을 알아야한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1:7 인간의 가장 큰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이 교육의 사명을 주셨다. 부모는 육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 힘써야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명자이다. 지혜와 지식의 성장을 도와 세상에서도 부족함이 없이 소통하게해야한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세우는 길이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완전한 인격자로 성장해 가도록 돕는 부모라야한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길이 인생 최고의 복이며 행복의 지름길임을 알게해야한다. “~지혜를 가진자는 복되도다”잠3:13-18 창조주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 되심을 경외하는 지식을 전수해야한다. 십자가의 은혜와 정신과 생명을, 부활과 승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자로 세워야한다.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신4:10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결코 작은 계명이 아니다. 이 계명을 사랑한 에녹은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된다. 에녹은 선한 아버지의 삶을 살다가 들림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며 높은 계명이다. 가정에 주신 주님의 명령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하는데 필요한 법이다. 하나님은 가정에 천국을 실현하시기 위해 가족을 주셨다. 에녹이 구약에서 보여준 것은 부모의 사명이 큰 축복이며 구원의 완성을 위한 길이다. 오늘날 믿는 가정마다 이 영적인 사실을 주의하여 배워야만한다. 아버지의 길을 온전히 간 에녹은 들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명을 감당한 에녹의 영적 깊이는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초림주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재림주님을 예언하고 있다. 영적 부모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구원으로 인도한다. 오늘날 부모된 자들마다 들림의 축복인 큰 상급이 예비된 부모의 영성을 사모해야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27] 그리스도인의 영성- 아버지(들림)의 영성
-
-
변영혜작가의 「영생의 빛 3」
- 변영혜작가의 「영생의 빛 3」은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흔히 귀한 사람들을 빛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의 근원이시고 어느 빛과 견줄 수 없는 큰 빛이요 참 빛이 되신다. 그 빛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빛이 곧 생명이요 인생들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신다. (요 1:1-12) 이 빛을 영접하는(믿는)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빛을 아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요17:3)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그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주 안에 있는 은혜의 선물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롬6:23, 엡2:8~9) 그렇기에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이 보장된 것이다. (요3:16-36)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 사이로 흐르는 빛이 매우 인상적이다./대석교회 원로•미술평론가
-
- 오피니언
- 칼럼
-
변영혜작가의 「영생의 빛 3」
-
-
관념적 애국보다 실천적 애국을
- 사람은 저만을 위해 살 수도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 수도 있다. 나라와 민족이 안중에 없노라고 억지 쓸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대다수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라고 자처한다. 평상시에 별로 개의하지 않다가도 유사시를 당하거나 외로운 환경에 처하면 누구나 나라와 민족을 그리워한다. 사랑이 관념에 그칠 때에 도리어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고, 한낱 감상에 그침으로써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 비분강개와 호언장담이 애국의 실증이라고 오인하면 허무한 메아리만 거둘 것이요, 나아가서 광포와 망동이 뒤따르면 그 해독은 사랑 없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파시즘이나 미디어의 일면에는 그러한 점이 있다. 그러한 경우를 위하여 사랑은 실천적이어야 하고, 실천은 이성적이라야 한다.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가 정치를 바로잡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 할 경우, 만일 독선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관념적이요, 비이성적인 예라 하겠고, 투자 효과를 무시하고 재원을 낭비한다면 역시 그러하다. 경제 개발을 연구하는 학자나 실무자들이 시정의 투자 효과를 논하고 투자 순위를 야무지게 따지는 데 반하여, 항간에 비경제적인 투자 행위가 없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슨 까닭에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무원칙적인 자원 분배를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절대 비애국적인 행위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애국심이 관념적이어서 무엇이든지 큰 사업이나 큰 시설을 일으키면 큰 개발이 될 줄로 안다거나, 외국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을 능사로 안다거나, 타인에게 과시하고 국민에게 과시하는 것이 국위를 높이고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투자 효과의 과학적인 분석의 내용이 결여되어 한정된 자원을 절도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을 비과학적인 애국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정자는 물론이요, 국민 전체가 크게 각성해서 관념적이 아닌 실천적인 애국심을, 독단적이 아닌 과학적인 애국심을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인 사랑은 숭고한 정열을 욕할 뿐 아니라 심원한 이성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관념적 애국보다 실천적 애국을
-
-
[향유옥합] 아무튼, 환대
- 바늘 귀에 실을 길게 꿰는 사람은 멀리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던가. 평소 실을 1미터 정도나 꿰었던 나는 사랑 따라 무려 태평양을 건넜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면서 한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다양한 사회에서 30여년을 지냈다. 하나님의 딸, 부모님의 딸로 사랑받던 나는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오랜 여정을 지냈다. 겹겹이 쌓인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바탕에서 나를 지탱해준 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고 포용해주는 환대였다. 나그네 혹은 이민자로 살아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남, 여정, 환대 같은 화두는 나의 삶과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환대는 물론이지만, 일상을 떠나 낯선 길에서 받는 환대의 경험은 때로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된다. 화끈한 문신으로 새기지 않아도 내 피부 어딘가, 눈과 마음 속 기억의 나이테로 아로새겨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환대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처럼 놀라움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경험한 무수한 환대의 추억은 자양분과 촉매제가 되어, 씨앗이 싹을 틔우듯 다시금 나와 타인을 환대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순환한다. 얼마 전 어머니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성년기를 외국서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고 있는 이즈음, 어느새 80대 노모가 되신 나의 엄마와 함께한 몇 주간의 여행은 애틋하고 즐거웠다. 마음에 남는 따스한 기억이 여럿 있지만, 그 중 몽마르뜨 언덕을 보고 내려온 일이 생각난다. 낮에는 미술관을 보고 저녁이 돼서야 지하철로 그 곳을 향했다. 다음 날 저녁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 숱한 예술가들이 살았다는 그 언덕 골목을 거닐며 파리 야경을 내려다보는 시간은 아름다웠다. 정상의 대성당에서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어 함께 기도했던 마무리 또한 더없이 뜻깊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와 호텔로 가는 길을 검색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사진도 많이 찍고 길도 헤매서 나도 올케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다. 우리가 의존할 방법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대중교통 정류장 근처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길을 물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녀 청년은 우리 일행에게 바로 주의를 집중하고 길을 찾아 주었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을 자신들의 전화기로 검색해서 버스 한번만 타면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젊은 여성은 자기 노트를 꺼내 타야할 버스와 열세 정류장만 가면 되는 것과 내려야할 정류장 이름을 써주었다. 남자 청년은 15분 후 버스가 올 것이고, 버스가 하차할 정류장 직전에 좌회전을 하지만 호텔은 오던 길에서 곧장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명료하고도 상세한 안내에 거듭 고마워하면서 우리는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얼마 후 기다렸던 버스가 오는데 저 방향에서 손 흔드는 게 느껴져 보니, 아까 길을 알려줬던 두 젊은이가 우리 일행이 버스를 제대로 타는지 그때까지 살피다가 ‘그 버스 맞아요,’ 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칠까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던 거였다. 어둠 속에서도 돌봄과 환대의 미소는 또렷이 보였다. 나는 ‘고마워요, 이 버스 타고 잘 갈게요,’ 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엄지를 올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또 지금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얼굴이 생각나곤 한다. 앞으로도 종종 몽마르뜨 언덕과 함께 소환될 것이다. 그들의 친절과 환대는 여행에서 만난 어떤 풍경과 작품보다도 내 마음에 닿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 환대(歡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그리스어로 환대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 philoxeno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우정 또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을 뜻하는 ‘제노스(xenos)’가 합쳐져 ‘이방인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우리라는 공동체 밖의 이방인을 맞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환대라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손님(guest)으로 풀이된 ‘제노스’라는 단어는 외국인(foreigner), 낯선 사람(stranger), 이국인(alien) 등의 뜻이 있지만, 재미있게도 주인(host)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환대의 주체는 주인만이 아니고 손님도 해당되며,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 상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인이 환대를 베풀지만, 방문한 손님도 환대를 베푼다. 하나의 시공간에서 그렇듯, 우리 일생을 두고 영원한 주인도, 영원한 손님도 없다. 서로 베푸는 환대를 서로 주고 받는다. 환대는 특별한 대접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이 이 지상에 사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 생존 권리가 환대다. 이러한 권리는 마땅히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대받을 권리를 내세운다면 타자의 환대받을 권리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환대권의 평등한 상호성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성경의 황금률 (Golden Rule)은 환대의 정신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환대는 특권 행사가 아니다. 환대받을 권리의 평등성이 우리가 누리는 환대권의 기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타인을, 창조세계의 모든 타자를 내 몸처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사람이 사람을 반갑게 맞아 존중하고 아끼고 잘 대접하는 환대의 세상이 아니다. 제노포비아(xenophobia), 호모포비아(homophobia) 같은 혐오증이 코로나처럼 퍼져, 자신의 공동체 밖의 사람을 환대하기보다는 냉대하고 홀대하고 적대한다. 우리는 자신이 환대받는 데는 열심이지만 타인을 환대하는 데는 인색하며 서투르기 짝이 없다. 환대는 특권이 아니지만 부단히 갈고닦아야 할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그런 친절함, 다정함의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그런 사람 옆에서는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호텔(hotel), 호스텔(hostel), 병원(hospital)이 다 라틴어 ‘호스피탈리타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환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고대 신성한 여행자들에게는 숙박을 제공하고 그들이 아플 때는 정성껏 치료해 주었던 환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며, 전쟁터 같은 이 세상, 상처받고 아픈 이들에게 야전침대를 펼쳐 치료의 손길을 내미는 병원 같은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나처럼 오랜 시간 타국에서 나그네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벗님이 얼마 전 우리 부부에게 음반을 보내주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뜻밖의 선물, 감동적인 환대였다. 무반주로 나직이 부르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은 내 속에서 울긋불긋 꽃대궐을 차려주고 호수처럼 내내 출렁거렸다. 외국에서 음악 공부와 활동을 하며 나그네로 오래 산 이방인의 경험이 있는 베이스 성악가의 목소리는 그래서 내게 남다르게 들렸다. 지난 주말, 다른 벗님의 초대로 음반으로 들었던 한국 가곡을 독창회 공연으로 접하는 호사를 누렸다. 더없이 뭉클한 환대의 자리였다. 관람 중 한곡 한곡 마칠 때마다 우리 부부에게서 각기 다른 뉘앙스의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성악가의 목소리로 듣게 된 곡들은 그리움과 외로움 같은 나그네의 심경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려 영혼의 교감을 깊이 느끼게 했다. 가사집을 보지 않아도 마지막 절까지 속으로 따라부를 수 있는 익숙한 곡들이 대부분이어서 좋았지만, 새로운 곡들도 참 좋았다. 그 중 마음에 등불을 켜듯 따스한 불빛을 간직하고 돌아온 노래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산속에서>이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갖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환대하는 이 대림절, 누군가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깜깜한 밤을 지나는 자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에게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처럼, 맞잡을 손처럼, 어깨를 감싸는 힘처럼 나그네에게 계속 걸어갈 동행이 되어준다는 것은.../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향유옥합] 아무튼, 환대
-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8) 내 사랑을 흔들지 말라
- 큰도성, 큰 길로 달리며 신랑 되신 주님을 찾았으나 찾기는 커녕 봉변만 당한다. 어렵사리 다시 되찾은 그분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 그분을 놓지 아니하였다.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놓지 아니하였도다. ‘내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자녀를 잉태하고 낳은 곳을 의미한다.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를 낳은 곳이다. 최초로 신부 되게 한 교회가 ‘어머니의 집’이다. 그러면 누가 신부 되게 낳았는가? 성령이시다. 성령이 신부 교회로 인도하여 거기서 나를 신부 되게 한 것이다. 즉 성령이 어머니와 같이 역사한 것이다.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은 어디인가? 그 방은 ‘내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야 있다. 또 성령께서 우리를 어머니의 집인 신부 교회, 즉 계2장, 3장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 하신다. 그리고 신부 되게 하는 말씀을 주시고 믿게 하여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잉태하여 세우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를 잉태하여 낳은 방이 된다. 나를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성령님이 낳는 역사를 하시는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또 옛 사람 이었던 우리를 성령이 중생케 한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성령이 잉태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에게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종말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받은 것이 어머니의 집이다. 또 우리를 잉태 한 방은 어디인가? 일곱 금촛대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계속 신앙이 자라면서 순교신앙으로 세워진 것을 말한다.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어 진 신부성도가 신랑 예수를 꼭 붙들고 자기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왔다. 이는 순교신앙으로 세운 그곳으로 돌아와서 영원히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는 또다시 신랑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3:5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와 구별된다. 그들은 아1:5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적 신앙에 속한 성도들이다. 또 ‘내가’는 신부 성도를 가리킨다. 그가 원하기까지는, 즉 신랑 예수님이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4절에 신부 성도가 잃어버렸던 신랑 예수님을 찾아서 그분과 잉태한 방에 함께 있는 상태이다. 다시는 밤에 침상에서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하리라. 이는 그분의 사랑을 신부 성도의 심령의 아구까지 채우는 일을 예수님이 하심을 뜻한다. 그래서 그분과 신부 성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지면 얼마든지 자기 남편, 즉 신랑 예수를 나가서 거침없이 자랑하며 증거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육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은 자기 남편을 증거 하지도, 자랑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영적 신앙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신랑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처럼 육적인 성도들이 영적인 성도들을 방해하고 핍박한다. 그래서 노루나 들 사슴으로 부탁한다고 했다. 이는 신부 성도에게 지금 은혜 베푸시는 신랑 예수님이 마치 노루와 사슴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는 내 남편이신 그분의 사랑에 내가 푹 빠져 들리라. 그리하여 내 속에 그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그리된다면 내가 나가서 그분을 자랑하며, 증거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렇게 해 주시는 주님이 바로 노루와 들 사슴 같다는 것이다. 노루나 들 사슴이 귀가 밝아서 세미한 소리에도 놀라서 급히 달아나지 않느냐? 그러하니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 오피니언
- 칼럼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8) 내 사랑을 흔들지 말라
-
-
성서와 생활 [26]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령충만의 영성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 ~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예수님께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1 라고 축복하셨다. 이 말씀은 곧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신 기름 부음의 사건이다. 평강을 명하심으로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에게 임한 두려움울 제거하셨다. 즉 능력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서 두려움의 죄를 사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명하신다. 성령을 받은 자는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려주신다. 죄 사하는 능력은 성령의 일이며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신 생명이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8고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영원한 생명이다. 이 성령을 주시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부활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자는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성령의 사역자가 될수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통로가 되기 위해 자신을 전혀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확실한 흔적을 가진 자로서 살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2:20라고 증언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한다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 가는 유일한 길이다. 나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주님의 사역이 우리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라고 선포했다. 우리 자신도 주님처럼, 바울처럼 십자가의 생명이 없다면 결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자아의 진정한 깨어짐으로 인한 죽음이 없다면 십자가의 역사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 의한 겻이다. 사람의 뛰어난 말과 음성은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수 없다. 매일 일상에서 십자가가 깊이 역사할수록 성령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아담에 속한 육신의 요소를 십자가로 처리하는 체험적 신앙만이 성령의 생명을 얻으며 성령의 충만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와 생활 [26]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령충만의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