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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를 알면 정신건강이 보인다 (1)
      천재지변이나 참사 등, 외상을 경험하여 병을 앓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의 환자들은 뇌의 신경가소성에 의한 원리에 의해 삶에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것을 보게 된다. 충격적인 사건을 체험한 후 대부분의 환자들은 기존에 인식했던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꿔버려 파괴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것은 외상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뇌의 신경가소성 기능으로 인해 뇌의 구조가 변질되고, 그 기능도 변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스트레스와 경험의 기억이 지속되는 동안 환자는 내내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불안한 상태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없어 고통 받게 된다. 사건을 통한 자신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뇌의 가소성에 의해 삶은 파괴적이게 된다.   20세기 신경과학의 가장 획기적인 발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울신경(Mirror Neuron)이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거울에 내 모습이 그대로 비추듯이 우리 뇌에는 거울신경이 있다.   1990년도 중반, 이탈리아의 지아코모 리졸리티와 그의 연구진은 원숭이들이 포도를 먹을 때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원숭이들이 포도 먹는 모습을 볼 때와 똑같은 신경이 점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를 ‘거울신경’ 또는 ‘공감신경’이라고 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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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1~16)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38년된 중풍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다. 영원 전부터 나를 아시고 나를 택하셨으나 주님은 내게 먼저 물으신다. 나의 주권을 인정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 내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신다. 믿음은 일방통행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이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가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소.”(요5:11)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시었다.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인데 유대 토라와 히브리 구전 법에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39가지 더 첨부되었다. 바느질도 못하고 불도 켤수 없다. 하루에 2000규빗(약900m) 이상 걷지 못한다. 추수, 탈곡 금지 규정에 의해 이삭을 자르거나 비벼서 먹을수 없다. 구덩이에 빠진 어린양도 구해 올릴 수 없다. 먹이를 던져주고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막2:27~28)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일을 행하고 일곱째날은 창조주를 기억하며 거룩하게 지켜라.   우리의 일생을 마치고 저 천국 이르러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전생(全生)을 들고 간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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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건강교실] 편도선염 및 편도선염 수술(상)
      찬 공기에 건조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건조한 날씨는 구강 환경도 건조하게 만들어 세균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그러다 목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입을 벌리고 입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는 편도선에 염증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감기는 바이러스 질환임에 반해 편도선염은 세균성 질환이므로 치료 약물이 달라진다. 편도선에는 세균 감염으로 생기는 ‘편도선 염증’(급성편도선염)과 크기가 커져있는‘편도선 비대’(만성편도선염) 이 두 가지 병이 가장 흔히 발생한다. 또한 어린이들의 코골이도 편도선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목이 아프면 다 편도선의 염증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목 안에는 편도선 이외에 목안 뒤쪽 벽인 ‘인두’나 목안 아래쪽 성대주위인 ‘후두’에도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이때도 목이 아플 수 있다.   그럼 어떤 경우에 편도선 때문에 목이 아픈 건지 알 수 있을까? 편도선에 염증이 생긴 경우는 △침 삼키기 힘들면서 △고열이 나고 △몸살 기운이 아주 심한 특징이 있다. 특히 심한 경우 밥도 먹기 힘들어지며 숨쉬기도 힘들어 질 수 있다. 집에서 입 안을 손전등으로 비추고 거울로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다. 목 양쪽에 호두모양의 편도가 평소보다 커져 있으면서 빨갛게 부어있고, 심할 경우 하얗게 고름이 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편도선은 괜찮은데 목젖 뒤의 벽이 빨갛게 도드라져 있다면 인두염일 가능성이 많다.   편도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입안을 벌리고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내면서 목 안쪽을 보면 목젖 양쪽으로 편도가 큰 사람은 호두알처럼 보이는 덩어리가 보일 것이고, 작은 사람은 쭈글쭈글한 덩어리가 보일 것이다. 편도는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오는 세균 등을 걸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세균 자체의 감염이 많이 발생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편도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편도선은 대개 소아에서 점점 커지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에는 점점 작아지게 되고 성인이 되면 평소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염증이 생기는 경우 성인이 되어도 비정상적으로 계속 커져 있을 수 있으므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편도와 아데노이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심한 목감기인 급성 편도선염의 경우는 침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이 아프며 고열이 나고 몸이 춥고 떨리며 머리도 아프고 뼈 마디마디가 쑤시는 것처럼 아프면서 간혹 귀가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만성 편도선염으로 인해 자주 목감기가 걸리거나 항상 커져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통증은 없지만 목에 뭔가 걸려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가래를 뱉을 때 악취가 나는 노랗고 좁쌀만한 덩어리가 나와 불쾌감을 주게 된다. 충치가 없고 별다른 이유 없이 입에서 냄새가 나면 편도선염이 원인인 경우도 많다.   다음에는 이 편도선염의 치료법에 대해 알아보자.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이비인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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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계명 지킴의 순복으로 기쁨의 화답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과 희락의 특별 은혜   성경은 사람의 죄인된 정체성을 알게 한다. 더불어 주로인해 구원 받고 자녀된 정체성 회복을 은혜로 주신 사랑 메시지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담의 후예들은 원죄로 인해 사단에 매인 자들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랑 메시지를 밝히 증거 하시어 구원의 도를 좇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보람과 행복으로 만끽하게 되는 영혼 구원의 발견이다. 이를 살리는 일이라 하시어 누구든지 주를 영접하면 주께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신 상고 목적에 화답을 찾는다. 이처럼 주께서 열어 놓으신 십자가의 길로 들어간 자의 기쁨과 행복에 대한 선함의 말씀이다. 영생의 길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종으로 회복이며 이들에게는 불변의 구원임을 확증해 준다. 이를 거듭남이라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시어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게 하신다. 더불어 이 길은 이웃 사랑의 실천과 함께 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증거 하신다.   살아 있을 때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언약의 법칙이다. 이를 알고 좇아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구원의 도이다. 인생은 유한하기에 누구나 한번은 죽음에 이른다. 그러기에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하라고 하셨다. 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도다고 전도서 기자는 말씀한다. 하지만 거듭난 자들은 육체의 년 한이 끝난다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는 부활 생명의 존재임을 밝혀준다. 이와같이 계명에 순복한 자는 새 피조물로써 삶의 존재목적을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는 주의 백성이다. 주로부터 거듭남은 영생을 얻은 천국백성으로 주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이 땅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영생에 소망을 두고 몫을 하는 여정이다. 구원은 살아있는 동안에만 주를 영접할 수 있고 복음을 듣고 새 가치를 정립할 수 있는 특별은혜이다. 결국 생명을 얻은 자의 마침은 죽음과 동시에 천국 입성이며 영생을 누리는 부활이다. 이 삶은 은혜로 주께서 이끌어 가시는 복된 여정으로 주께서 견인임을 확증해 준다. 거듭난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이 있기에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로 위에 것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소망이다. 영생에 소망을 가진 믿음은 생명과 희락과 평안의 행복한 여정이다. 이를 알고 얻게 하기 위한 산 자들의 전도는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주의 나라 확장을 이룬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무명한 자일지라도 주 안에서는 유명한 자요 주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주께서 목자가 되셨기에 천국백성으로 영혼에 부족함이 없는 부유함이다. 곧 모든 것에서 자족하게 하는 범사에 감사로 항상 기뻐하며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화답을 한다. 은혜를 입은 주의 자녀임을 확증한다. 즉 말씀 가운데 주의 자비와 긍휼로 나의 나됨이 주의 은혜임을 알고 사랑의 빚진 자로서 화답케 된다. 주를 안다는 것은 생명으로 거듭남이며 영생이다. 오직 창조주만이 영생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주께서 죽고 부활을 나타내 확증해 주셨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회복한 자는 주님 밖에 믿을 이가 없음을 알고 고난이 온다할지라도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순복으로 화답을 한다. 주 없이 살수 없다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성령의 견인으로 사랑하심을 확증케 된다. 주와 한영을 이룬 자들이 이웃 사랑의 전도로 얻게 되는 약속된 충만한 기쁨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곧 진리에 거하는 복된 자들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선을 이루어 사랑의 화답함을 확증한다. 그 사랑이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며 전도로 화답함임을 새기며.../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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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신과 종교 문제에 대한 진지성과 치열성① -오승재의 단편소설
      20대의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다가 생의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수학 공부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이후에는 아예 수학 교수로 생활을 하며 문학의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었던 사람이 생의 후년에 들어와 다시 문학 쪽으로 회귀하는 기이한 삶의 궤적을 보인 이가 소설가 오승재(1933- )이다. 그는 1959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로 등단하였고, 그 후 한남대학교 수학 교수로서의 직을 영위하다가 은퇴한 후,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 작가의 문학적 업적으로는 은퇴 후 70대에 들어와서 펴낸 그의 창작집 <神 없는 神 앞에>(2005)와 80대에 들어와 펴낸 <급매물교회>(2014)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는 <제일교회>와 <대성리교회>, 그리고 <신 없는 신 앞에>… 등 합계 12편의 단편소설들이 실려 있으며, 후자에는 <급매물 교회>와 <목갈치 교회의 목사>, <넘을 수 없는 벽>… 등 합계 17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필자는 상기 작품들 중에서 <제일교회>와 <대성리교회>, 그리고 <급매물 교회>와 <목갈치 교회의 목사> 등 무슨무슨 ‘-교회’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소설들을 오승재 작가의 “4대 ‘교회 시리즈’ 작품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교회 시리즈 작품들 속에서 오 작가의 예리한 필치가 번득이며, 한국 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데, 이 방향에서의 비판의식을 따라잡을 다른 작가를 우리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상기 작품들 중에서 필자는 먼저 앞의 소설집(2005)에 실려 있는 <제일교회>란 단편소설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제일교회>는 한마디로 표현해 재미있는 소설 작품이다. 그 재미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강한 풍자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풍자성은 일종의 반어적 풍자성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아마도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를 연상시키는 이 ‘제일교회’는 무엇이나 제일이요 최고이다. 그런데 다른 일로 최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독교회의 일로 제일이요 최고니까 그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 있어서도 역시 제일(최고)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이 제일교회에 대한 풍자가 그 극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사랑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할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가난한 걸인들을 옹호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걸인들을 다 사랑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 예배보기 위해 출입하는 걸인들에 한해서만이라도 배려(사랑 베풀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인간인지라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교회(예배당)에서 최소한 그들에 대한 노골적인 천대 행위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에 최고(제일)인 ‘제일교회’는 걸인들에 대한 천대(문전박대)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이다.   이 일로 그 교회의 원목사와 부목사 사이에 의견대립이 일어나고, 부목사가 거지를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난처해져 버린 원목사는 결국 그 부목사를 인천의 어느 작은 교회로 쫓아버린다. 이런 원목사의 배후에는 영향력이 매우 큰 방 장로가 도사리고 있다. 이들 연합세력은 위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도 않는 편이다. 말하자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와 시무장로가 합세하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반기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셈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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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그의 집
        히브리서 3장 6절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고 하신다. 또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왜 주님이 사도일까요? ‘내가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았다.’(요20:21)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유일무이한 한 분이요, 대문자로 사도가 곧 주님이시다. 사도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참 아버지를 알게 하신다. 또 그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성령 부어서 사도들로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신 분이 곧 대문자 사도이시다. 또 우리의 고백하는바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대제사장이면서 또 제물이 되신다. 그래서 자기 몸을 친히 제물로 드린 것이다. 즉 영원속죄구원의 단번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이미 제사장 멜기세덱으로 계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주신 분이셨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멜기세덱 계열에 따른 대제사장 예수이시다.   그리고 현재도 대제사장으로 계시어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늘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신다. 이 그리스도 예수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스럽다 했지요. 왜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모세의 영광도 크지만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온 집, 즉 우리들의 심령의 집을 직접 지어 주시는 분이시요, 아들이시다. 내가 제3일에 성전을 세우리라.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제3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들이 성전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가 곧 심령성전이다. 이 성전을 건축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모세보다 더욱 영광 받으시기에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이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히3:6)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 그리스도 예수가 곧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히10;21) ‘우리를 구원하시어 아버지의 영광을 받게 해 주실 분이 곧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확신하고 끝까지 붙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하신다.   그의 집이라 함은 재림하시는 그 그리스도 예수의 집이라. 즉 그의 아내라는 것이다. 그의 아내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로 예비 됐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심령 성전의 건축이 그리스도 예수로 완공 됐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집이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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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7
  • 행복신앙세미나 29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영생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행복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넘겨 받으신 후 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심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깨끗이 씻겨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으면“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요 3:36)라는 말씀처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28)라는 말씀처럼, 멸망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면 결코 불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금수저, 은수저’ 라는 말을 하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생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위치는 연극의 배역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왕의 배역도 있고 거지의 배역도 있지만 잠시 머무를 뿐 실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초점을 맞추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위의 말씀처럼, 세상에서 얻은 것은 세상에서만 잠시 사용될 뿐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세상의 지위나 권세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가르치시며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위는 영생을 얻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기에 항상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도 부요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예수님을 통해 속죄와 영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편에 있습니다. 서로의 선물을 누릴 머리카락과 시계를 잃어버린 델라와 짐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최고의 하나님의 선물일지라도 받지 않으면 헛된 선물이 됩니다. 왜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는 걸까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마 9:12)라는 말씀처럼, 자신이 죄로 인해 멸망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아서 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일지라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헛된 선물로 만듭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관에 손님들로 가득차서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가 머물 수 없었던 것처럼, 완전한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 대신 본인 생각에 행복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로 그 마음을 채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며, 심령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선물들은 일시적인 기쁨을 줄 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영생은 영원한 기쁨을 주십니다. 이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선물을 헛된 선물로 남겨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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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6
  • 정성구박사 칼럼
      한·미동맹은 <한·미혈맹>이다. <한·미방위 조약>은 1953년 6·25 전쟁 중에 리승만 대통령이 만들어 냈다. 정말 신의 한 수였다. 8월 8일 한국의 변영태 외무부장과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서명을 했다. 당시 덜레스 장관은 조인식을 지켜보던 리승만 대통령을 격하게 끌어안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과 당신 나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이 조약은 여기서 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 되었습니다(This is mark of Respect to you and your country for what it has stood for. It is treaty in the blood of our seal what hae died here). 그래서 한·미동맹은 그냥 군사동맹이나, 경제동맹이 아니고 말 그대로 피로써 맺은 <혈맹> 관계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서울의 길거리에서, 인터넷상에서 한·미동맹을 철폐하고, 미군은 물러가라! 는 시뻘건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단순한 교통사고임에도 미순이, 효순이를 지금까지 우려먹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송송 난다는 웃지 못할 프레임을 만들어 미군 때문에 남북통일이 안되었다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붉은 머리띠를 두른 반미 데모대들은 정말 <한·미동맹>이 <한·미혈맹>이란 사실을 알 턱이 없다. 물론 미국은 우리 하고만 동맹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일본과 유럽 여러 나라와 동맹을 했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그 시기에 만에 하나 리승만 박사의 영단이 없었던들 지금의 자유대한 민국은 아예 지구상에 없었다.   그러면 거리에서 미군 철수를 외치는 자들과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반미적 구호와 젊은이들은, 6·25 때 미군이, 공산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망가지고, 피바다가 된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던 그 사실을 알기나 할까? 하기는 전교조의 집요한 가짜 교재를 통해, 6·25는 공산당의 남침이 아니고, 한국군과 미군의 북침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전 정부는 북한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그쪽 구호와 그쪽 정책을 구체화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하기는 한국의 각계각층의 수만 명의 고정 간첩들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 놓고 있다. 옛날 간첩은 고무보트를 타고 왔지만, 오늘의 간첩은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 사뿐히 내린다. 이러니 이 나라의 과반수 이상이 세작들의 선동선전에 물든 정치, 경제, 문화, 법조, 언론의 합작으로 만들어 낸 한·미동맹 철폐, 미군 철수를 외쳐도 누구 하나 말하는 자들이 없다. 나는 한·미동맹 때 외무장관이었던 변영태 선생 아래서 영어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얼마나 진실하고 정직한 장관이었는지,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면 남은 돈을 반드시 국고에 넣었다. 1960년대에 그는 종로의 시사 영어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하면서 입에 겨우 풀칠을 했었다. 그는 초대 외무장관으로 영문학자였다.   나는 35년 전에 이화장에 가서 리승만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후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는데,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기운 양말을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고, 금년에도 다시 이화장을 방문했었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희망이 없다. 우리나라가 세계 강국 6위가 된 것도 모두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수호>, <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 입국>에 기초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 정책에 기초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IT 시대가 되고 AI 시대가 되니, 인터넷에서 유튜브에서 말도 안되는 좌파의 공격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한·미동맹>뿐 아니고, <한·미혈맹> 인가를 조금 더 살펴보자.   6·25 전쟁에서 한국군은 137,899명이 전사하고, 연합군 자격으로 미국군은 33,686명이 전사했다. 그래서 우리와 미국은 공동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운 전우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맺은 친구이다.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미군은, 말 그대로 우리의 혈맹이 되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장군 아들들 142명이 참전하여 그중에 35명이나 전사했다. 그중에는 대통령의 아들도 있었고, 장관의 가족도 있었다. 특히 미8군 사령관 아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우리는 낯을 들기 부끄럽다. 당시 한국 사회는 빽 있고, 끝발 좋은 집 자녀들은 모두가 군에 가지 않고 기피자들 천지였다. 설령 군에 가도 후방이나 좋은 보직 자리에 눌러앉던 시기에, 미국 장군의 아들들이 수십 명 전사했었다.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중위는 1952년 미 3사단의 중대장으로 참전했었다. 또 미 8군 사령관 월든 워커 중장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부자가 모두 6·25 참전 가족이 되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신임 소위 가운데, 365명이 한국전에 참가했다가 희생당한 장교가 110명이나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다 쓰려면 책 한 권도 될 수 있다.   나는 1951년 백선엽 장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기어이 승리하여 공산당을 물리친 것이 너무도 고마워서 대구시민이 유엔군과 미군과 한국군에게 선물로 만들어 준 실크로 된 <감사의 손수건>을 지금도 늘 성경에 책갈피처럼 넣어 다니고 있다. 만에 하나 그 당시 대구가 공산당에 무너졌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없어졌고,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한 유엔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고 오늘의 번영된 국가로 세계 6위에 올랐다.   한국인 중에 무슨 못된 사상을 받았는지, 피 흘려서 나라를 지켜준 혈맹관계인 미군을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지? 제발 은혜를 모르는 못된 국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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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8
  • ['그 사랑' 거룩한 성화 3화]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의 참 뜻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 사람에게 생명 얻게 하는 산 자들의 일용할 양식 성경은 선한 일에 사랑의 성화를 찾아 좇게 한다.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시어 구분된 지침을 좇게 하셨다. 이를 위한 마태복음 6장7~15절의 주기도문이다. 주의 백성이 된 자들은 이미 주종의 관계를 성립한 자들이다. 종으로서 몫이 인내로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전도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의 성화이다. 더불어 오직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선함을 위한 사랑의 기도이다. 곧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기도와 연계되었음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 살리는 일에 지혜와 지식과 명철로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한 열매들의 나타남이다. 이를 위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는 존재의 목적에 하나되는 지침이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랑의 행함이다. 산 제물이란 구약의 문화를 들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되어 대신 죽임을 당하고 죄사함을 입게 하는 일이다. 곧 제물의 몫이 죄사함에 있으며 살리는 선한 일로써 주께서 기뻐하시는 주의 제자화이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여 주를 영접하게 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살리는 일을 원함이다. 이를 비유로 이사야 58장 6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영적 사단에서 해방되는 죄사함을 입게 하는 구원이 주의 기뻐하는 일임을 금식을 들어서 계시하셨음을 찾는다. 이 사랑에 대해 에스겔 33장 11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셨다. 무엇보다 영적 생명을 얻게 하는 선이다. 곧 산 자의 몫을 이웃 사랑의 성화에 두게 하심이다. 거듭난 자들에게 산 자의 몫을 하며 주의 제자화를 위한 사랑의 성화를 일깨워준다. 또 이 일은 주를 경외하는 일로써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거듭난 자들의 일용할 양식임을 확증해 준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이웃 사랑으로 순복하는 자들의 심령이 새롭게 되는 선한 일이다. 이 몫을 잘해야 하기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기도는 성도의 육체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유익함이 되어야 함을 찾게 한다. 이러할 때 주의 뜻대로 주의 나라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살리는 일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일을 잘 하도록 사랑의 지침을 분별하게 하신 주기도임을 확증케 한다. 곧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도록 하는 성화의 여정에 지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는다. 사랑은 주의 기뻐하시고 선한 일이며 산 자로서 사람 살리는 일임을 확증해 준다. 곧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와 이를 실천하여 나타나는 선한 열매로 거룩이다. 선한 일을 분별하여 좇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주기도에 담아 놓으심이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의 뜻을 알고 주종의 관계와 몫에 신본주의이다. 곧 산 자의 일용할 양식은 새 피조물로써 주의 제자화가 되도록 전도로 확장하게 하는 사랑의 성화임을 확증케 한다. 육체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가치관이다. 이 일이 주의 기쁨이 되는 성도의 일용할 양식으로 주의 선하시고 온전케 하는 일임을 새기며 확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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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7
  • 성과 속, 그 첨예한 대립상(5)-유재용의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유재용의 장편소설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는 다소 허망하게 그 말미(末尾)가 장식되고 만다. 주인공 박요단의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이다. 그녀를 구원해 내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쳐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내 권미림은 끝내 그를 배신해 버렸고, 그의 교역 사업의 상징적 성과라고 할 개척 천막교회는 불타 없어져 버리고 말았으니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유재용의 이 소설이, 아니 이 소설의 허망한 결말이 가장 기독교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라는 판단에서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필자는 불가피하게 기독교 세계에서의 다른 사례들을 몇 가지 동원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역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의 제시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이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는 같은 문학 작품 가운데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겠다. 영국 작가 A. J. 크로닌의 장편소설 <천국의 열쇠>(1941)를 통해서이다. 주인공 치셤 신부는 옛 친구요 신학교 동창인 안셀모 밀리 신부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과는 달리, 애써 고난의 길을 걸어간 신부였다. 나중엔 유럽을 벗어나 중국으로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그는 여러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무너져 있던 성당 건물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지어놓았으나, 그게 홍수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찾아 기른 고아소녀 안나가 그를 배신하고 비적 와이츄 병사를 따라가 버린 일… 등이 그를 무척 괴롭게 하였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주님의 은총과는 무관한 가련한 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 실패를 딛고 일어선 영원한 내적 승리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패배의 잔영은 그의 ‘참 교역자 상’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여러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모두 생의 말년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을 주님을 위해 불가피하게 버린다. 실제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남겨놓은 그 순교의 신앙으로서의 흔적이 전혀 아무것도 아닐까? 아니다. 그들은 일견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 희생(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최후 승리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사도행전 6~7장) 속의 인물 스데반의 경우를 보기로 하겠다. 히브리파 신도들 앞에서 용기 있게 주님을 증거한 헬라파 신도 스데반은 그 굳센 믿음과 용기 있는 증언 때문에 히브리파 신도들에게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투석형에 처해졌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7:59~60)라고 부르짖으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의 이 죽음이 무의미했던가? 아니다. 스데반의 이 죽음이 앞으로 이어질 그리스도인들의 허다한 순교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박요단은 자신의 사랑을 암흑가의 한 여인에게 베풀고, 주위의 악의 세력과 싸워 그 나름의 사회정의를 구현해보려고 애썼지만, 그의 의지는 현실 앞에서 끝내 좌절되고야 말았다. 그는 단지 한 패배자의 위치에 머물고 마는 것일까. 아니다. ‘참 교역자 상’을 보이는 그는 표면적 패배를 딛고 일어선 내적 승리자임을 위 사례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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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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