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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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현대문학 산책 49
       그녀는 술에 취하여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울었다. 경아는 만준에게 받은 위자료로 사업이라고 하다가 다 털어먹는다. 그녀는 술에 절어 살다가 자신의 팔뚝에 청색잉크로 그려진 하트모양의 문신을 새기고 소유권을 행사하는 이동혁이라는 사내에게 농락을 당하며 술집 호스티스가 되었다.  경아는 그녀가 나가던 술집에서 대학 미술과 강사이자 화가인 김문오를 만나게 된다. 문오의 6층 꼭대기 층 아파트에서 문오와 경아가 동거하게 되었다. 문오는 경아의 재롱과 응석에 빠지고 그녀는 사람 좋은 문오에게 푹 빠진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에다 남자들에게 짓밟혀 온통 멍투성이인 그녀와 이지적이고 로맨틱한 문오의 사랑은 계속될 수 없었다. 게다가 경아에게 문신을 새긴 이동혁이라는 사내가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하며 문오와 경아를 괴롭혔다.  경아는 깨어 있으면 술병을 들고 살았다. 술에 취해 넋두리를 하며 울었다. 문오와 경아는 아파트 창문 베란다에 팔꿈치를 괴고, 아까의 눈물은 말끔히 가셔 정결한 얼굴로 밤하늘을 오도마니 쳐다보았다.   “별이 예쁘군.” 나는 나지막하게 말을 하였다. “별이야 예쁘죠. 멀리 있으니까요.” “그런가.” 나는 웃었다. “그렇군”    경아가 조그만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가야, 나와 놀자,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 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6    문오도 입술만 꼬부려 휘파람을 불어 경아가 부르는 노래에 따라 부르고 있었다. 경아는 어릴적부터 노래를 잘불렀고 장래에 성악가가 되고 싶었었다. “들어가요. 바람이 차요.” “그런가, 벌써 가을이군.”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경아가 잠옷 바람으로 입술을 빨면서 흘리듯이 말했다. “왜 겨울이 좋나?” “난 겨울이 좋아요. 먹을 것만 많으면 겨울이 제일 좋잖아요?”7    겨울의 한 가운데에 이르러서 경아는 문오에게 소원을 말한다. 최인호 작가는 경아를 겨울여자로 묘사한다. 겨울을 좋아한다는 경아의 희망은 자신이 죽어 눈내리는 겨울 강가에 뿌려지는 것이다. 그의 육신이 재가 되어 강가에 뿌려지지만 그 우로 하얀 눈의 진혼곡이 내려진다.   “난 가족도 없으니까 죽으면 화장해서 눈 내리는 강가에 뿌려줬으면 좋겠어요. 난 그게 소원이에요. 아니, 내 희망이에요.”8    경아는 죽을 땐 예수 믿고 죽겠다고 한다. 그래서 천당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안 믿기지만 죽기 하루 전엔 교회에 나갈 테라고 문오에게 말한다.   “난 내일 일을 몰라요. 난 내 한 몸이라서 갈 곳도 없고 그래서 딱히 갈 곳이 없으면 죽고 말테예요.”9    이동혁이 찾아와 문오에게 경아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부터 경아는 점점 술에 취해서 살았다. 문오는 경아에게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경아가 아파트를 떠나고 문오는 고향에 내려갔다가 대학에 강사자리를 은사가 추천한 편지를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문오는 초가을 학교의 젊은 강사들과 시내에 들러 술을 마시고 이차로 가자고해서 들린 곳이 조그마한 맥주홀이었는데 그 곳에서 경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문오가 경아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 해도 저물어가는 연말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경아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이동혁이 문오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왔다. 동혁은 술에 쪄들어 주정만 일삼는 경아를 매질로 다스려도 보고 했지만 어찌 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문오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자신은 이제 배를 타러 부산으로 내려간다며 종이쪽지에 적힌 경아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문오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로 흥청거리는 미아리 언덕 부근, 경아가 있는 술집을 찾았다. 경아는 추했고 몸은 굉장히 비대해져 있었다. 용모에도 관심이 없는 듯 되는대로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경아는 문오에게 백 원짜리 한 장을 달라고 해 그 돈으로 밴드를 불러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무대 위로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자랑에 나온 초등학교 아동처럼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불렀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10    최인호 작가는 경아가 부르는 노래말처럼 그녀에게서 사랑이 떠나감을 예고한다. 경아는 갈라지고 탁해서 마치 남자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지만 술마시던 사람 중의 하나가 박수를 치고 재청을 청했다. 경아는 망설이지 않고 문오와 동 거하던 시절, 별을 보다가 부른 '아가야 나와 놀자.달마중 가자'를 재창으로 옛날 순박한 시절을 노래했다.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6. 최인호, 별들의 고향 2 209-210쪽 여백 2013 7. 최인호, 별들의 고향 2 216쪽 여백 2013 8. 최인호, 별들의 고향 2 261쪽 여백 2013 9. 최인호, 별들의 고향 2 262쪽 여백 2013 10. 최인호, 별들의 고향 2 369쪽 여백 2013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3-04
  • 한국 현대문학 산책 48
       이렇게 경아는 만준과의 만남을 이어가게 되던 어느 날, 만준의 승용차로 스카이웨이를 달리다가 멈춰 서서 만준과 단둘이 식사를 하였다. 둘은 밖으로 나갔다. 눈 아래 서울의 야경이 명멸하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맑은 하늘 위에 동전보다 큰 달이 걸려 있었고 별들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만준이가 경아를 쳐다보며 떨리는 소리를 내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경아 씨.”(3)    경아는 만준의 어깨 너머로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경아가 좋아하는 별은 어디에 있을까.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경아가 점 찍어둔 그 가물가물 보일 듯 말 듯 연연한 빛을 던지고 있는 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찾았다. 만준은 경아의 약지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며 청혼을 했다.  경아는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층계에 밀레의 만종 복사화를 사와 붙여놓고 꽃을 사다 응접실에 그리고 방마다, 나중에는 변소까지 꽃을 꽂아놓았다.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방방마다 만준의 죽은 전처의 사진이 벽에 붙여져 있고 숫제 응접실 벽에는 초상화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경아가 사진과 그림을 치우려는 의사를 청주댁에게 했더니 그녀가 펄쩍 뛰는 것이었다. 청주댁은 이층 구석진 방에는 경아에게 죽은 전 마님이 있던 방에는 마님이 쓰던 물건이 고스란히 있다고 했다.    “나도 몇 번 들어가 본적이 있었지만 주인 양반님은 하루에 몇 번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시 곤 한다우, 이건 참 이상하지만 밤에도 그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시곤 해요, 아 글쎄 그 방 엔 죽은 마님의 잠옷같은 것이 그대로 걸려있고 거의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전 마님의 옷가지랑 화장도구가 그대로 놓여 있다우, 거참 이상도 하지, 아마도 주인 양반님이 죽은 전 마님을 너무 사랑한 모양이우, 하지만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참한 아가씨를 맞았으니 갑자기 할 생각을 말고 차츰차츰 없애 시구랴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4)    경아는 청주댁의 조언을 받아 만준의 죽은 전처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늦추다가, 인근 구멍가게에서 젊은 청년을 두 명 불러다 만준의 전처 물건을 김장독을 쌓아두는 지하실 속으로 옮겼다. 직장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만준은 분노했다. 어느 틈엔가 경아는 한숨을 자주 쉬는 여인으로 변해버렸다. 최초의 남자인 경아를 망가뜨렸듯이 두 번째의 만준이가 주는 음습하고 우울한 생활은 경아를 조금씩 조금씩 파괴하고 부서뜨리고 있었다.(5)    경아는 의처증이 있는 만준으로 인하여 전처가 자살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경아는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헛구역질을 하게 되어 임신인 줄 알고 만준의 선배 되는 종합병원 산부인과 의사 김상필 박사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김 박사는 본의 이니게 타인과의 행위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경아의 소파 수술의 흔적을 만준에게 알려주게 되었다. 경아가 영석이로 인해 임신을 했고 허름한 산부인과에서 소파수술이 잘못되어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사실을 만준이 알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병적인 만준의 의처증이 발동되어 경아는 결혼한 지 십 개월도 채 못 되어 두 번째 버림을 받았다.  스물두 살, 찬연히 피어오르는 한참 나이에 경아는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이미 함부로 무너져 있었다. 눈만 뜨면 술을 마시고 핸드백 속에는 신경안정제를 넣고 다니고 있었다. 경아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이혼 도장을 찍었다. 언젠가 겨울에 버림을 받았듯이 또 한 번의 지루하고 긴 겨울의 침묵 속에 침몰했다.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3 최인호 별들의 고향1 246-247쪽 여백 2013 4 최인호 별들의 고향1 296-297쪽 여백 2013 5 최인호, 별들의 고향1 332쪽 여백 2013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2-24
  • 한국 현대문학 산책 47
     소설에서 경아와 문오를 연결 짓는 기호로서 껌은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소설의 첫 장 ‘돌연한 사건’과 종장 ‘경아 안녕’에 이르는 서사에서 중요 매개체가 껌, 술이다. 눈 내리는 겨울에 시작해 눈이 쏟아지는 겨울로 끝이 난다. 《별들의 고향》은 눈 내리는 초겨울의 어느 날, 경아의 자살이 알려지면서 한때 동거했던 화가 문오가 그녀의 시신을 화장해 한강의 놋 배를 타고 뼛가루를 뿌리는 종장으로 이어진다. 경아와 문오를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술, 눈, 껌이라는 기호가 소설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경아는 1947년생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단신으로 월남해 강원도 어느 시골 역에서 역부로 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꽤 알려진 조그마한 양조장 집 딸 다섯 명 중 셋째였다. 경아의 할아버지는 양조장을 경영하는 사람치고는 술고래였다. 경아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받아 일가족이 영등포 근처에서 셋방을 살았다. 경아는 노래를 잘했다. 음악 선생은 늘 경아를 교단 앞에 세우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경아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녀의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경아가 연인처럼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난한 현실을 맞게 되었지만 어머니의 만류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음대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입학금 마감 날에 경아의 어머니는 한 달 7푼의 고리로 이자 돈을 꾸어서 등록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봄에 꾼 돈 7푼의 이자가 원금보다 많아져 2학기 등록을 포기했다.    경아는 조그마한 무역회사 경리직으로 취직했다. 그 곳에서 유난히 가불을 자주 부탁하는 영업부 직원으로 여섯 살 연상인 강영석과 사내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만날수록 영석은 경아의 육체를 구애하였다. 경아는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에 영석에게 떠밀려 마침내 남루한 호텔 방에서 첫정을 맺었다. 경아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다방에서 영석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영석은 킬킬거리며 농담으로 치부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스피커에는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최인호 작가는 그 당시 음악다방에서 D.J가 틀어주던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당신을’을 주제가이면서 배경 음악으로 흐르게 한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에이 에이 에이 에이 에이 에이 ”. 경아의 첫 남자 영석은 경아의 육체만 사랑했을 뿐이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노래는 영석과 경아의 헤어짐을 예고한다. 강영석은 거듭 소파 수술을 요구했고 며칠 후 종로 3가 극장 옆 골목에 있는 허름한 산부인과에서 경아는 애를 지웠다. 의사는 허가 있는 의사가 아닌 듯이 보였고 가운에 땟자국이 흐르고 있었다.    영석은 선금 오천 원을 꺼내주었고 의사는 경아를 진찰실로 데려갔다. 분명 사내는 마취를 한다고 하였지만 심한 통증에 경아는 비명을 발했다. 영석은 그의 어머니가 경아를 탐탁하지 않아 하니 궁리 끝에 경아에게 이별 편지를 보냈다. 영석은 어머니가 중매한 여성과 며칠 내로 결혼할 예정이며 직장도 옮겼으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며 경아에게 쐐기를 박았다. 안준배/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2-09
  • 한국 현대문학 산책 46
     1970년대 문학을 선도한 최인호가 1972년 9월 5일부터 1973년 9월 9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별들의 고향》을 통하여 경아를 대중 앞에 내놓았다. 나는 역촌동 자취방에서 매일 아침마다 조선일보 가운데를 펼쳐 연재소설 지면부터 읽었다.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 하루를 시작했었다. 내 나이 스무 살에 조선일보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오십사 년 동안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신문지면에서 연재소설이 사라졌지만.                              ◇'별들의 고향'의 한 장면  좌 김문오 역 신성일 우 오경아 역 안인숙    대학에 미술 강사로 나가고 있는 김문오는 간밤에 마신 술로 인하여 악몽 같은 어둠을 기어가 수돗가의 수도꼭지를 콸콸 쏟는 차디찬 물에 입을 틀어막는 작업을 대여섯 차례나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잠에 빠져버렸는데 날카로운 새벽 전화 벨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오후에 서대문경찰서 수사과에 출석하게 되었고 방 형사로부터 어제 시립병원 무료 진료실에서 숨을 거둔 여성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해수욕복을 입고 물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의 여인이 바로 그와 한 일 년 동안 동거생활 했던 오경아였다. 그녀는 간밤에 술을 먹고 눈길을 걷다가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끝에 잠이 들었고 방범대원이 발견해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경아의 백 속에 김문오의 전화번호와 이름 석 자만 쓰인 메모와 낡은 사진 한 장이 있어서 김문오를 시신을 수습할 적임자로 보고 출석을 요구했던 것이다. 김문오는 시체 인수서류에 서명날인하고 나오는 길에 방 형사에게 그녀의 유품인 핸드백과 주머니 속에 있던 껌 한 개를 받아들고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코트 속으로 백을 숨겨 들었고 나머지 한 손에 들었던 껌의 포장지를 무의식중에 벗겼다. 그리고 껌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껌은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게 내 입 안에서 녹아들어갔다. 그녀의 죽음이 입 속에 털어 넣은 껌으로 해서 그녀다운 장난스런 느낌으로 내게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참으로 그녀다운 죽음이군. 나는 웃었다. 그러자 두어 방울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경아의 죽음이 내게 껌 하나로 실감되는군. 그녀의 죽음과 내가 살아있음은 조그만 껌 하나로 연결되는군. 그래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조그만 껌을 씹는 것과 마찬가지지. 우리는 무의식중에 껌을 씹다가 아무렇게나 투ㅡ 껌을 뱉어버린다. 더구나 껌 하나를 남겨두고 죽은 그녀의 죽음은 얼마나 그녀다운가.   경아는 언제나 어디서나 껌을 씹고 있었다. 어느 때는 두세 개를 한꺼번에 넣어서 씹고 있었다. 가끔 귀여운 입을 후ㅡ내불어 크나큰 풍선을 만들어냈다. 경아는 씹던 껌을 버리지 않고 벽에 붙여두었다. 부엌의 찬장 옆에, 욕탕의 거 울 위에, 화장대 크림 병위에, 변기 앞 세면도구함에, 타액을 후면에 잔뜩 묻혀 살짝 벽에 붙여 놓곤 했었다. 문오는 훗날 경아가 벽에 붙여놓은 껌을 발견해 그것들을 뜯어 씹곤 했었다. 최인호는 작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기호로서 경아에게 일상적이다시피 한 껌을 매개체로 사용했다.   /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2-02
  • 문학평론⓶ 70년대 청년문화의 토대를 이뤄낸 최인호 소설
    최인호는 1971년의 한여름에 그때 빌빌 놀고 있던 덕수국민학교, 서울중고등학교 동창생 이장호 영화 조감독과 청주에 있는 조그마한 여승 절인 화장사란 곳에서 한여름을 머물렀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 것 같다. 만약 쓰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겠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설의 소재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 이장호는 조감독으로 백수건달이었는데 최인호의 말을 듣더니 당장에 눈빛을 밝히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 소설을 내가 영화화하자. 약속해 임마. 그 소설은 내거야.”                                          ◇소설 별들의 고향은 1974년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조선일보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다는 것은 최인호가 원하는 하나의 바람이었을 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리 만무한 황당무계한 소망이었다. 당시 신문소설은 50년대 작가들의 독무대였다. 역사소설은 으레 박종화, 유주현의 차지였으며 현대소설은 40세 이상인 50년대 작가들이 대부분 쓰고 있었다. 손창섭의 《부부》,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가 인기를 끌었으며 60년대 작가로는 유일하게 이청준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다가 도중하차한 뒤로는 젊은 작가들에게 신문 연재를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신문사의 편집진들은 갖고 있었다. 조선일보 문화부장 유경환이 1972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던 황순원과 박영준에게 신문소설에 새 바람을 넣고 심은데 추천할 만한 젊은 작가가 있느냐고 묻고 그이들이 최인호를 거론해주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손장순이 쓰는 《세화의 성》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때에 유경환이 최인호를 만나 신문 연재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스물여섯 살 최인호에게 최대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는 기회가 성큼 다가왔다. 최인호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의 소냐, 톨스토이의 《부활》에서의 카츄사,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의 올렌가, 토마스 하디의 테스처럼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한번쯤 깃들었다 스러지는 누구나의 호주머니에 한번쯤은 소유했다 버려지는 여인,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나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연인, 한국판 올렌가와 테스를, 예쁘고 착한 환상적 여인상을 그려내려 하였다.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되어 마치 자신의 첫사랑이나 친근하게 느껴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여주인공을 내세우고자 했다.   별들의 고향   1970년대 문학을 선도한 최인호가 1972년 9월 5일부터 1973년 9월 9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별들의 고향》을 통하여 경아를 대중 앞에 내놓았다. 나는 역촌동 자취방에서 매일 아침마다 조선일보 가운데를 펼쳐 연재소설 지면부터 읽었다. 《별들의 고향》을 읽어야 하루를 시작했었다. 내 나이 스무 살에 조선일보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오십사 년 동안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신문지면에서 연재소설이 사라졌지만.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1-23
  • 문학평론 19 극작가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
    이반은 도시의 황폐화를 바라보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984년에는 희곡<바람 타는 성>으로 제20회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았다. 조보라미는 이반의 분단극은 종교극과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반의 종교극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타자를 외면하지않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나를 희생할 정도로 책임지는 것.그리고 그럴 때 비로소 진리와 자유, 평화가 실현된다는 기독교적인 이상이다. 이반의 분단극은 월남민의 절절한 망향의식을 넘어 분단 극복 방안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현실의 억압 혹은 작가의 한계로 인해 분단극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하게 추구되지 못했다면, 한일문제를 다룬 종교극에서 비로서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한일 문제를 다룬 종교극은 분단과 종교 문제가 결합,착종되어 있는 이반 희곡의 특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된다. 아울러 이반의 분단극에서 제기된 분단 극복 방안이 종교극에서 풀린다는 것은 그의 전 작품세계가 기독교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반은 2008년 8월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정년 퇴임했다. 그는 오십여 년 동안 육지. 땅,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썼는데 이제는 어렸을 때의 바닷가로 돌아가서 바다와 하늘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설악문화예술포럼이 주관한 '작고문인 이반의 희곡작품연구 심포지엄'이 지난 2022년19일 속초문화예술회관소강당에서 열렸다.   이반은 북쪽 고향 홍원이 가장 가까운 고성, 감나무가 가득한 왕골마을의 싸근다리집으로 부인 한순자와 이사를 하고 살았다.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집에, 글은 아동문학가 이현주에게 받아서 문간에 반시재(盤柿齋) 라는 현판을 달았다 ’ 반시재‘를 풀어 보면, 본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이명수인데 휴전 직후 속초항에 내려와 있던 미군이 이명수를 양아들로 삼으면서 피터peter 베드로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 있고 명수는 소년 때부터 이반이라는 이름을 썼다. 시(柿)는 감나무이고 재(齋)는 집이란 뜻이다. 그래서 ’반이네 감나무집‘이라는 의미이다. 이반은 귀향해 속초예총 회장을 지내며 지역 연극진흥에 큰 힘을 보탰다. 그는 2018년9월26일, 추석날 하나님 곁으로 떠날 때까지 분단극과 종교극으로 ,하늘과 바다를 그의 작품으로 그려냈다. 이반은 제7회 기독교문화대상 희곡 <심판을 막는 사람들>로 연극부문 상을 받았다. 이반의 희곡선집에는 빠졌지만, 그의 작품을 다 모아 보면 이반의 분단극과 종교극의 다른 이름으로 ’심판을 막는 사람‘이라고 명명 해도 될 것이다.       안준배 기독교문화예술원 원장· 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6-01-22

실시간 문학 기사

  • 박이도 시집 「지상의 언어」 영역본 출간
      박이도시인(사진)의 시선집 「지상의 언어」(창조문예사)의 영역본 「Language on the Surface of the Earth」가 출간됐다. 이 시집은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영원성을 추구했다. 「지상의 언어」는 지난 2013년 일본에서 출간된 시집으로, 그 대역본이 같은 해에 국내에서 국문으로 발간됐다.   이 시선집은 시인의 대표적 시들을 엮은 만큼 그의 시적 경향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이도시인은 “후반기에 와서 특히 시가 짧아지는 등 어쩔 수 없이 인생론적인 경향을 띄게 된다. 흔히 ‘서정적 자아’라고 말하는데, 사물을 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발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확인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험한다”고 이 시선집을 소개했다. 「지상의 언어」는 △황제와 나 △어느 인생 △을숙도에 가면 보금자리가 있을까 △축제의 노래 △민담 시집에서 등 5부로 구성됐으며 110여 편의 시를 수록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05
  • 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2)-심훈의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보다는 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할 것이다. <흙>의 주인공 허숭은 단지, 지식인이 우리 농민들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농촌봉사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시혜적 입장(만)을 토로하고 있음에 비하여,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은 지식인이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유리된 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농민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농촌의 실상을 체험을 통해 파악하고 그들의 경제적 자활운동을 힘써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보건대, 작가 심훈은 전혀 선배인 춘원(이광수)의 체질과는 다른 체질을 지닌 이였다고 하겠으니, 농촌계몽 소설이란 범주에 들 수 있을 두 편 소설 작품들의, 어느 정도의 상호 유사성으로 인하여 심훈이 다소 춘원과 유사한 체질로 인상 지어진 것은 심훈 자신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왜냐면 춘원이 ‘하강적 모델’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심훈은 ‘상승적 모델’에 해당하는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흙>의 주인공 허숭의 입장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춘원이 내세웠던 브나로드 운동의 기본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상록수>의 주인공 동혁의 그것은 신문사의 그 공식적 입장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동아일보가 내세운 브나로드 운동의 기본 입장이란 것은 ‘동족을 사랑하는 열성’과 ‘문맹을 물리치려는 헌신적 노력’에 모아져 있었다. 곧 동족을 사랑하는 열성으로 농촌계몽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할진대 문맹을 퇴치하게 될 헌신적 노력은 자연히 기울여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봉사활동에 대한 결과보고를 부탁받고 일어선 박동혁은 그 경지를 뛰어넘는 발언을 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자의 간섭(곧 그 발언이 제지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박동혁은 이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신,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발언에 대하여 사회자는 절대로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차례로 발언하도록 지목을 받은 채영신 역시 동혁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녀는 처음엔 발언을 사양했는데, 이유인즉슨 남학생을 먼저 발언하게 하고 여학생인 자기를 후에 발표하게 한 것이 불쾌하다는 것과 또 사회자가 무어라고 제재를 하게 될 것 같으니 그런 구속을 받아 가면서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마지못한 듯이 일어나서 한 말은 이러했다.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한절대다수인 농민들의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우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주자는 박동혁 씨의 의견은 저도 전적 동감입니다!”   결국 박동혁이나 채영신이나 모두 문맹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농민들에게 그들의 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희망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긴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이광수의 <흙>의 주인공 허숭은 화려한 경력에다 출세에의 욕망이 뒤범벅이 되어 농민들과의 동화라는 게 사실상 어려웠지만(아니, 수상쩍은 인물로나 비쳐지고 배척을 당하기까지도 했었지만), 심훈의 <상록수>의 주요인물들인 박동혁과 채영신은 투철한 사명감과 농민에 대한 사랑으로써 쉽게 그들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과 동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로부터 신임까지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결코 쉽사리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보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2-02
  • 기독교적 바탕의 농촌계몽 소설(1)-심 훈의
      올해는 우리나라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대섭(1901~1936)의 탄생 120주년의 해이다. 심훈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 심대섭은 춘원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30년대 농민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상록수>로 인하여 일단은 이광수의 인상을 많이 연상시키는 작가라고 보겠다. 심훈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증거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의 둘째 형 명섭이 기독교회의 목사였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학적을 두었던 대학이 미션계인 항주의 지강(之江)대학이란 점을 감안할 때 그가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는 그의 <상록수>의 주인공을 기독교 신자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점이 이채롭다고 하겠다. 여주인공 영신을 신도로 설정하여 청석골에서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 사업을 펼치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희생 봉사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기독교소설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상록수>를 제외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상록수>에서는 긍정적인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을 지닌 채영신과 세속적 이념의 견지에서 세계를 개혁하려는 박동혁의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이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 곧 민족주의적 이념의 공통분모가 시대적 표증으로 한데 묶여질 수 있었기 때문인데, 작품의 결미 부분에서 주인공 영신이 애석하게 희생되는 일을 통해서, 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한 민족에 대한 사랑 역시 그 근원을 기독교적 희생정신에 두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민족주의 정신을 작품상에 반영한 심훈이 그의 유명한 항일 민족시<그날이 오면>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 예언적인 민족문학 작품은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헤브라이즘적 체질의 예언시를 오늘 이 땅에 재현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일제 강점기 문인들 중의 일부 인사에 속하기는 하지만, 당대에 그가 민족적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호례의 시가 바로 <그날이 오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시편 가운데 기독교적 언어가 직접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적 위기에 처한 구국적 충정을 시인의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토로해내고 있는 이 시편은, 정치 사회적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북이스라엘 왕국을 구해내고자 현실 참여적 외침을 애국적 민족시를 통해 토로했던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헤브라이즘적 ‘예언시’의 전통이 그대로 오늘 이 땅에 되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농촌계몽 소설 또는 농민소설로 지칭되는 몇 편의 굵직한 장편소설들이 나왔다. 이광수의 <흙>과 이기영의 <고향>, 그리고 심훈의 <상록수> 등으로서, 이들 중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작품이 한국 기독교문학사에 엄연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록수>라고 하겠다. 이 작품에 대해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의 기독교 문학적 특성에 대해서는 그 연구가 결코 풍성한 편은 아닌 현 실정이라고 하겠다.   여러 가지 기독교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소설 <상록수>는 이 방면의 선행 업적이라고 할 이광수의 <흙>과 자주 대비되어 논의되기도 하였다. 같은 30년대의 농촌계몽 소설로서 역시 같은 ‘동아일보’ 지상에 연재된 작품이며, 그 신문사의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나온 작품들이란 공통점 때문이었으리라.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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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11-24
  • 25일, 제5회 명시·명언 특별서예전
    홍덕선서예가, 13명의 시와 명언을 원곡체와 궁체로 작품화   소망화랑(대표=홍덕선장로·사진)은 제5회 「명시·명언 특별서예전」을 오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소망화랑에서 갖는다. 서예가인 홍덕선장로가 시와 명언을 원곡체와 궁체로 작품화해 전시한다. 이 전시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시와 명언, 서예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   이번 서예전에는 박이도원로시인을 비롯한 13명의 시인과 김경래장로, 서예가인 홍덕선장로가 참여한다. 박이도시인의 「겨울 나그네」, 박종구시인의 「사랑」, 김소엽시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 최규창시인의 「커피향기 속에」, 김연수시인의 「기다릴 그대 있어」, 최일도시인의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도」, 정재영시인의 「하늘강」, 조신권시인의 「횃불 항아리」, 이정균시인의 「갈대사랑」, 오성건시인의 「가을연가」, 박완신시인의 「일어나 생명길 걷자」, 금보성시인의 「모래」, 권성묵시인의 「부메랑」, 그리고 명언으로 김경래장로의 「하늘이냐 땅이냐」, 서예는 홍덕선장로의 「시편 37편 46절」 등이 전시된다.   박이도시인은 “먼 길 떠나기 위해/단잠에서 깼다/아직 어둠이 머뭇거리는/새벽하늘에 아침이 온다/희끗희끗 날리며 앉으며/순식간에 천지를 휘감아/화살 짓는 눈발/서로 부딪치며 떠밀리며/지상엔 하얀 폭풍이 인다/나뭇가지 위의 새둥지가/툭, 떨어지고 새들이/포롱포롱 황급히 떠난다/굳게 닫힌 성당 문이 삐꺽/천장에 누워 있던 12사도가/모자이크를 털어내고 걸어 나온다/뚜벅뚜벅 눈 속으로 떠나간다/그 뒤를 내가 따라 나선다/열둘 그리고 열셋의 발자국이/하얀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발자국 뒤로 남는 헛기침 소리”란 「겨울 나그네」에서 12사도의 뒤를 따라 나서는 박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박종구시인은 “십자가 위/못박힌 손과 발/그 아픔보다 더 목말라/했던//그것은//너와 나/그를 향해/그토록/옹색하기만한/그것은”이란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김소엽시인은 “이루지 못한 사랑마다/별이 되게 하소서//이픈 이별마다/별이 되게 하소서//눈빛과 가슴으로/수천 수만 대화 나누고/멀리 두고 바라만 보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특히 김경래장로는 1902년에 태어나 33세에 별세한 차재선전도사의 명설교 제목인 「하늘이냐 땅이냐」를 소개했다. 차전도사는 이 설교에서 “소망의 천국인 하늘을 바라보고 사느냐”의 명언을 남겼다.    이 「명시·명언 특별서예전」을 준비한 홍덕선장로는 “전시회때마다 관람자들이 감동을 받는 것을 볼때마다 계속 「명시·명언 특별서예전」을 준비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모든 작품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형상화했다”면서, “이 서에전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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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11-24
  • 죄의식에 사로잡힌 고뇌의 인간상(4)-박영준의
      최광주가 지금껏 참고 견디는 자기희생의 삶을 통해 그 자신이 터득하게 된 것은 자기의 그런 자세가 아내(삼애)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란 점과 그런 연민이나 동정심만 가지고서는 아내를 진실로 사랑할 수도 없다는 사실의 인식이었다. 진정한 부부생활은 정신적인 면 못지않게 육체적인 사랑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구(반신불수)의 아내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기로 마음먹었고, 또한 그 일을 성사시키는 기적(?)도 이뤄낼 수 있었다. 아내 역시 그 일의 성사를 미세하게나마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그 조그만 행복도 그에게 오래 허락되지는 않았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의 부부행위가 가져다준 후유증이 아내의 정신적인 면으로까지 비화하여 그녀는 고뇌의 빛과 함께 심한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일기장 사건이 또 터졌다. 우연히 어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던 딸 경선이가 어미에게 들켜서 심하게 꼬집힘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꼬집힌 자리는 광주가 보기에도 몹시 독이 오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심하게 꼬집지는 못할 만큼 대단한 상처였다. 삼애가 경선이를 꼬집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그녀가 성적 불구자가 되었다는 울적한 자의식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의 치부(추한 과거)가 일기장으로 인해 들통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 번째 꼬집힘을 당했을 때, 경선이는 아직 삼애의 깊은 비밀까지는 엿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것이란 육감이 들었던지 경선이는 그 일기장을 또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런 일을 다시 또 당하게 된 삼애는 경선이에게 “나가라!”고 소리쳤으며, 동시에 앞으로는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외쳤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경선이는 실제로 집을 뛰쳐나갔고, 결과적으로 고아원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작품상에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경선이가 두 번째로 삼애의 일기장을 들여다보았을 때, 이번엔 삼애의 잔인한 비밀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미가 “나가라”고 한다 해서, 또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란다고 해서 어린 경선이가 곧장 집을 뛰쳐나가 그날 밤 돌아오지도 않은 일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에 눈을 뜬 삼애의 자의식 때문에 결국은 그런 가정 불행마저 초래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감동적인 곳은, 자신의 그런 행위를 뉘우치고 곧 언니(신애)의 딸 경선이를 데려오라고 남편(광주)에게 간청하는 삼애의 진심에 찬 애절한 부르짖음의 장면이다. 이리하여 경선이는 집으로 돌아왔고 가정은 화평의 상태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 회복도 잠시뿐 폭풍은 새로운 방향에서 불어닥쳤다.    동생 대주와 목사 딸이 어울려 외박을 한 사실이 들통 나서, 목사는 교회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고, 광주 역시 동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결국 이 두 가정은 이삿짐을 꾸리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 교회의 통상적인 치부까지도 고발하고 있는 이 작품은 목사나 광주의 가정이 부닥치는 일시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참된 승리자는 김 장로나 김 집사 같은 율법주의적인 부류의 교인들이 아니라, 목사나 광주와 같이 죄의식이나 책임의식에 둔감하지 않은 진실한 신앙인이란 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1-15
  • 죄의식에 사로잡힌 고뇌의 인간상(3)-박영준의
      장편소설 <종각>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면을 이하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 최광주는 현재 심삼애의 남편으로서, 세 자녀와 미혼인 남동생 대주까지 모두 여섯 식구의 가장이다. 그런데 그의 아내 심삼애는 지금 반신불수의 몸으로 늘 자리에 누워만 있는 불구자로, 3년째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삼애는 광주의 전처였던 신애의 친동생이었다. 전처였던 신애는 딸 경선이를 하나 낳고서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신애가 자살을 한 이유는 제 남편이 그녀 동생 삼애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는데, 그 일이 남편뿐만 아니라 동생 삼애에게도 똑같이 책임이 있는 일이었고, 남편 못지않게 동생 삼애의 비행에도 그녀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해, 남편의 비행에 대해서는 물론, 동생에게 사랑하는 남편마저 빼앗겼다는 분노감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믿었던 측근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최대의 배신을 당했다는, 분노를 수반한 자괴감 때문이었다고 보겠다.    친 형부를 빼앗은 삼애도 후에 그 패륜적인 죗값에서랄까 반신불수의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장본인인 삼애는 그녀의 그런 비극이 그녀 자신의 죄과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여인이다. 두 아들을 낳아 놓은 뒤 이런 비극을 당했으니, 자신의 불구로 인해 온 가족에게 미치는 불편함이 오죽할까마는,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크게 뉘우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어미에 비해 딸 경선이의 정성은 너무도 지극하다.    광주에게는 친딸이지만 삼애에게는 친딸이 아닌 경선이는, 열세 살이란 나이로는 너무 성숙하다 할 만큼 집안일에도 열심이지만, 또한 어미 봉양도 극진하다. 이 아이는 삼애가 자기 친모가 아니란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아이의 정성이 더욱 갸륵하게 보인다. 아마 아비 광주로서도 이런 집안의 분위기가 숨 막히는 일이었을 것이다.(게다가 동생 대주는 집안에 별 쓸모가 없는 존재로서 형 광주에게 무리한 부담만 안겨주는 실정이다.)    전처 신애가 자살을 한 이후로 광주는 크게 충격을 받고서, 자세한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 들어와 세례를 받은 뒤 자진해서 사찰 직을 맡았다. 이로 인해 받는 약간의 수입과 평일 장사를 해서 번 돈 등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불구(반신불수)의 삼애가 죄의식을 크게 지니고 있지 않음에 비해, 광주는 지금껏 너무도 큰 죄의식에 몸부림쳐 왔다.    그가 타종할 때는 꼭 열다섯 번씩 줄을 당기곤 했는데, 이는 자기가 범한 열다섯 여인에 대한 속죄의식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열다섯이란 숫자를 자기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자행하던 속악한 인간이었음엔 틀림없으나 아내의 자살 이후, 충격 속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서도, 그가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은 결코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고도 하겠다.    변화된 이후의 최광주는 거의 고행자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죄악에 대한 속죄의식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그는 수년간 금욕과 극기의 생활을 해 오고 있다. 현재의 아내 삼애가 불구자가 된 것에는 공범자로서의 자신의 책임도 있다는 생각에서 벌을 달게 받는다는 심정으로 지금껏 참고 견디는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터득한 것은 무엇인지 자기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물음의 결과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1-04
  • 죄의식에 사로잡힌 고뇌의 인간상(2)-박영준의
    한국의 기독교문학사에 나타나는, <종각> 출현 이전의, 기독교적 내용을 다룬 다른 작가들의 소설작품들 중 공통적인 약점은 이것들이 기독교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대개의 경우 소재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거나 피상적인 관찰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의 문제, 십자가의 문제, 종말론의 문제, 궁극적 구원의 문제…등 기독교적 핵심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고 기독교 주변이나 그 역사, 또는 교회의 피상적이거나 외면적인 소재만을 찾아 형상화함으로써 기독교소설로서의 치열성이나 절실감이 부족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 약점을 박영준의 <종각>은 보완해주고 있다. 이 작품을 N. 호손의 <주홍글씨>와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보이는 것도 위에 이야기한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먼저,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양자(兩者)를 대비해 본다면, 주인공 최광주는 딤즈데일과, 여주인공 심삼애는 헤스터 프린과, 그리고 도덕주의를 표방하는 평신도들은 엄격주의에 젖어있는 미국의 청교도들과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양자는 서로 유사 영역을 공유한다고 보겠다.   <주홍글씨>가 죄의 테마를 다루었다고 한다면 <종각>도 죄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홍글씨>의 등장인물들이 육욕의 노예요 죄악의 하수인들임과 마찬가지로 <종각>의 주요 인물들도 육욕에 얽혀 허우적대고 있는 죄악의 군상들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한 성경 말씀처럼, <주홍글씨>의 주인공들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극적이듯, <종각>의 등장인물들 역시 몹시 불행한 결과에 이름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나 외형적인 그들의 불행과는 달리, 마지막이 그들의 철저한 회개로 인하여 속죄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면서 안도감을 느끼게도 되는 것이다. 딤즈데일 목사가 죄의식 때문에 받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혼의 구원에 이르듯, 최광주도 철저한 회심과 거의 고행이다시피 한 기독자적 희생의 삶을 통해 자신의 구원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하나 그가 아무리 속죄의 경건생활을 유지하려고 해도 그의 측근(가족)이 그를 이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그를 괴롭히기만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고통을 ‘속죄하는 마음’ 하나로써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죄에 대한 가책과 죄의식에 따른 고행자적 속죄의 삶을 통해서 그는 신에게 한 발짝 더 접근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광주를 한국판 딤즈데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릴런드 라이컨은 호손의 <주홍글씨> 가운데서 세 가지의 세계관이 있음을 지적해 냈다. 율법적(청교도적) 세계관, 낭만적 세계관,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 등이다. 박영준의 <종각>의 세계관도 결국 이 세 가지로 요약될 것으로 보인다. 김 장로와 김 집사 등은 율법적 세계관을, 심삼애와 목사의 딸 선희 등은 낭만적 세계관을, 그리고 주인공 최광주와 담임목사 등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소설로서의 <종각>(1965)에 대하여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종각> 이전의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기독교세계가 아닌 곳에서 작중인물이 자신의 타락과 죄악을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지만, <종각>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이 신(神)을 향해 ‘참회’(회개)함으로써 자신의 과오(죄과)를 씻어내는 것이다. 그의 소설이 기독교문학으로서 진일보한 면을 여실히 보여준 점이라고 하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0-20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3)-김은국의 〈순교자〉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신 목사는 동료목사들을 배반한 일이 없었다. 신 목사 자신이 그 사실을 증언하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 없었지만, 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정 소좌(인민군)에 의해서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므로 신 목사가 혐의가 없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일 정 소좌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신 목사의 혐의는 끊임없이 추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가정컨대 신 목사 자신이 자기는 동료 목사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은 목사의 그 발언을 액면 그대로 믿어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 목사는 자신을 변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배신자노라고 청중 앞에 공언하기까지 하였다. 명백히 이 발언은 사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신 목사를 규탄하고 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들은 시위를 통하여 신 목사를 “유다!”라고 지탄했던 것이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처럼 동료 목사들을 배반하고 자기만 살아남은 뻔뻔한 인간이란 식으로 신 목사를 대했던 것이다.   신 목사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었던가? 정 소좌의 말에서 드러난 것이었지만 모든 목사들이 인민군에 굴복하여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동료 목사를 불리하게 만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 목사만은 떳떳하고 의연하게 그 취조하는 인민군 심문관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그 담대한 모습에 감탄한 심문관이 신 목사는 살려주고 나머지 열두 목사들은 총살하고 말았던 것이다(이때 한 젊은 목사는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결과 총살은 면했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남아 있었던 신 목사이지만 신도들 앞에 결코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가 현장에 자신은 없었다고 거짓말했던 것도 실은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그리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죽은 동료 목사들의 추태를 말하거나 상대적으로 신 목사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거나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그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다음 그 자신이 현장에 있었고 자기가 배신자라고 뒤에 번복하고 나온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희생자가 되겠다는 각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열두 목사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목사의 의연한 자세가 바로 순교자의 자세라고 작가는 말하려고 한다. 이러한 신목사의 자기희생적 태도는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오는, ‘또 하나의 십자가’ 편의 피엘 신부의 태도와도 방불하다고 하겠다.   동족상잔의 폐허 속에서 극단으로 주리고 병든 신도들이 자신들의 절망감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들이 지금껏 신뢰해 왔던 목자의 떳떳하고 의연한 순교라고 할 때, 그 신도들에게 절망감을 배가시킬 것이 뻔한 그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는 게 신목사의 기본 입장이었던 것이다.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들이 이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 도저히 신 목사 자신으로서는 그리 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 목사에 의하면 누구나 다 십자기를 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사람이 십자가는 지고,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들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10-03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2) - 김은국의
       신이 제 구실을 할 때의 순교자와 그렇지 못할 때의 순교자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순교자가 전통적인 것이라면 후자의 순교자는 탈전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두 부류의 순교자들이 제시되는데, 하나는 12명의 죽은 순교자들이고, 또 하나는 1명의 산 순교자(신 목사)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열두 명의 죽은 목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냐 하면, 또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하면 순교자로서 떳떳한 죽음을 한 목사들이 아니었으므로) 이 작품에서의 실질적인 순교자는 신 목사 한 사람에 국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순교자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만은 계속 남아있게 하는 위력을 발하는 이 작품은, 그러므로 여기서 순교자가 누구냐 하는 데 대한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일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의 정치적 탄압이 어떻게 기독자들의 자기정체성을 잃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체험기로 루마니아 목사 R. 범브란트의 <하나님의 지하운동>과 불가리아 목사 H. 포포프의 <믿음 때문에 당한 고문> 등을 들 수 있다. 범브란트 목사나 포포프 목사의 수기 속에서 동료 목사를 배신하는 이들이 불가불 출현했던 것처럼, <순교자>의 정치적 상황 하에서 배신자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배신자들이 자신의 영달이나 편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심한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길이 없는 나머지, 인간의 약점에 스스로 굴복해   그리된 것이므로 이런 행위에 악의적 해석을 내릴 수만은 없는 것인 줄 안다.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 배신자들의 치부를 숨겨주려고 한다. 그 두 사람이 다름 아닌 신 목사와 장 대령이다. 그러나 결과야 같다 치더라도 동기 면에서 볼 때 두 사람의 관용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신 목사의 경우, 그 자신이 목도한 배신자들의 추태를 덮어주려고 하는 데에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 순수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정보장교인 장 대령이 배신자들의 실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덮어주려고 하는 데에는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의식이 뚜렷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 대령도 그런 은폐 작업을 통해 무슨 악의적인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저의를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어떤 정치적 의도에 그 사건을 짜 맞추려는 기본 입장만은 견지했다고 하는 데서 두 사람의 ‘종교적’ 동기와 ‘정치적’(군사적) 동기가 동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사정 모두를 다 알고 있는 독자에게 신 목사는 그렇게 비쳐지지만, 그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신도들이나 일부 목사들에게 신 목사는 오히려 배반자로 몰리고 있다. 그가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은 공산군에게 잡혀간 목사들 열네 명 가운데서, 열두 명이 죽고 두 명은 살아남게 되었을 때 그 살게 된 두 명 중의 하나가 바로 신 목사였기 때문이다(그중 한 명은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으므로 크게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 목사는 처음 동료 목사들이 살해될 때 자신은 그 현장에 없었노라고 말했다가, 후에 그 말을 번복하고서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무언가 뒤가 구린 데가 있는 사람으로 평양 신도들에게는 비쳐졌던 모양이다. 물론 이때의 신도들이란 대개 자신들의 담임목사를 졸지에 잃게 된 슬픈 양떼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목자를 잃은 허전함에 싸여 있다가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신 목사를 목격하게 되면서 신도들은 극도의 분노에 떨게 되었고 급기야는 신 목사의 거처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9-13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1) -김은국의 〈순교자〉
      순교 또는 배교의 문제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아 쓴 소설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외국의 작품들로는 아무래도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위대한 몰락〉, 〈여자의 일생〉 등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내 작품으로는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상〉과 김성일의 〈제국과 천국〉 등을 들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이 대열에 좀 애매한 위치로 서게 될 김은국의 〈순교자〉도 한 몫 끼게 될는지 모른다. 이 말은 〈순교자〉가 국내 작품으로 인정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생존 시에 김은국 작가가 미국 국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김은국의 〈순교자〉는 국내 작품으로 거론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외국(미국) 작품으로 치기도 석연찮은, 참으로 국적 미명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인상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김 작가)를 제쳐놓고 한국 기독교소설을 운위하기가 매우 궁색하다는 이유로 그를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어떻든 그는 한국 혈통의 작가요, 한국인의 숨결과 정신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한국적 배경을 떠나서 그의 소설 세계가 성립되기 어려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등에 불가피하게 끌렸기 때문이다.   1964년에 나온 이 작품(원작)은 그 2년 뒤(1966)에 나온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많은 면에서 비교되어야 할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극도의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될 때 거기서 순교와 배교의 문제가 발생하며, 자동적으로 순교자와 배교자의 출현도 있게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시절의 노바티아누스파와 도나투스파가 겪었던 일들이 이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가 된다고 보겠지만, 그 후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일들은 무수히 반복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다루었다는 면에서(만) 〈순교자〉와 〈침묵〉이 유사하다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나온 이 소설들은 그 공통의 주제, 곧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다루되 앞서 프랑스 문학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신 부재의 문학’, 또는 ‘신 침묵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정신에 기초하여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고 하는 면에서 두 작품은 상호 크게 유사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역시 당대에 유행하던 ‘신 부재(침묵)’의 사상이나 ‘신 죽음의 신학’이라고 할 기독교 신학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유(類)의 문학 작품들이 다분히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긍하게 만든다고 하겠다. 슈사쿠의 작품 〈침묵〉은 그러니까 ‘신의 침묵’이라고 할 때의 그 ‘침묵’의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김은국은 그의 〈순교자〉 속에서 주인공 신 목사의 입을 통하여, 전통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 모독적 발언을 해 대는 것이다. 말하자면 목사 신분인 사람에게서 저런 발언이 다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일반 독자들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치명적 발언을 해 댄다는 것이다. 이는 신 목사에 의해서 신은 인간의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면적을 거의 잃어가는 대신, 그만큼 그 잃어진 자리를 ‘인간’ 스스로가 메꾸고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신의 침묵의 시대에, 또는 신 부재(내지는 죽음)의 시대에 할 수 있는 인간의 일이란, 그 부재(또는 죽음)의 신의 영역을 인간 스스로 보완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신 목사는 그의 실천행위로써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신 목사의 언어나 행동이 초월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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