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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산책]한강,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 (17)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2-133쪽)  그들이 도청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내면속 양심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그들의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느꼈다. 도청의 어린 학생들까지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여겼을 것이다. 동호가  온다. 넋이 온다  상무대 공터에 군법재판소가 지어졌다. 최종 조서가 넘어간 지 열흘 만에 재판이 열렸다. 하루에 두차례씩 닷새 동안 재판이 열렸다. 한 번에 약 삼십 명씩 들어가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서기의 말이 떨어지자 앞문이 열리며 법무장교 셋이 차례로 들어왔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던 영재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의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되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피고인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무서운 군인들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래를 끝마칠 때까지, 소절과 소절 사이마다 위태한 침묵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간이재판소의 서늘한 공기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린 영재는 지난 십년 동안 여섯차례 손목을 그었다. 매일 밤 수면제를 술에 타서 먹고 잤다. 그 어린 영재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 영원히 살아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김진수와 교대 복학생 나는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 고문을 당하고 수사관이 원하는 거짓 자백을 했다. 그들은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다.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숟가락질을 했다. 계엄군은 그들을 굶기고 고문하면서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하려 했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란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김진수는 5.18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0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그는 유서와 도청 앞마당에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남겼다.    한강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 광주의 열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가는 열 살이었다. 한강은 초등학교만 다섯 곳을 다녔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해서이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교사 봉급으로 손아래 형제들을 맡아 키웠던 아버지가 막내고모까지 대학을 졸업시키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 한강은 가난했지만 한승원의 서가에 있는 갖가지 책들을 읽으며 공상을 했다. 불꺼진 방안에서 홀로 머리를 굴렸다.     한승원이 광주의 누군가를 조문하러 갔다가 그 도시의 터미널에서 구했다는 사진첩을 몰래 펼쳤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했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어린 한강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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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5-05-20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6)
      김진수가 자신의 총을 챙겨 굳은 얼굴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 너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와는 달리 긴장이 완전히 풀린 얼굴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수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총을 벽에 세워 놓더니, 창 아래 놓인 인조가죽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버렸습니다. 내가 흔들어 깨우자 신음하듯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잘께요. 이상한 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별안간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 했습니다. 나도 막막한 마음이 되어 김진수가 누운 소파 옆에 웅크려 앉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졸음이 오기는커녕 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곤두서야 할 시간, 냉정한 정신력에 의지해야 할 그 시간에, 우리들은 눈도 귀도 없는 뭉클뭉클한 잠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110-111쪽) 대학생 김진수는 도청이 진압되고 체포되어 7년형을 받고 이듬해 성탄절까지 특사로 석방되었다. 김진수는 여성적인 외모로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 치겠다며 위협당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 그는 석방된뒤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어 도청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9년형을 받았던 스물세살의 교대 복학생의 증언이다.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 김진수는 도청을 빠져 나가지 않은 중학생 아이에게 마지막 순간에 항복해서 목숨을 건지라고 설득했다. 가장 길었던 5월의 깊고 검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중에 직선으로 쓰러져 죽은 아이들이 보였다.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꿇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 이었습니다.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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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5)
      시가지를 벗어난 트럭은 어둑한 벌판 가운데로 난 텅빈 길을 달렸어. 참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어. 트럭이 잠시 멈추자 보초병 둘이 경례를 붙였어. 보초병들이 철문을 열 때 한번, 닫을 때 다시 한번 길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어. 트럭은 거기서부터 좀더 언덕길을 올라가, 단층 콘크리트 건물과 참나무 숲 사이 공터에서 멈췄어. 그들이 운전석에서 걸어 나왔어. 트럭 후미의 잠금쇠를 푼 뒤, 다시 2인1조로 우리들의 팔다리를 잡고 나르기 시작했어. 턱으로, 뺨으로 미끄러지며 매달려 내 몸을 따라가면서 나는 불 켜진 단층 건물을 올려다 봤어. 무슨 건물인지 알고 싶었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내 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공터 뒤의 덤불숲 사이로 그들은 들어갔어.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다시 열십자로 차곡차곡 몸들을 쌓아올렸어. 내 몸은 아래에서 두 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렸어.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눈을 감고 반쯤 입을 벌린 내 얼굴은 숲 그늘에 가려 더 창백해 보였어. 맨위에 놓인 남자의 몸에다 그들이 가마니를 덮자, 이제 몸들의 탑은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되었어. (46-48쪽) 정대는 이미 죽어 혼만 있는 상태에서 5.18 희생자들의 죽음을 증언한다. <소년이 온다>의 등장인물은 고립된 상황에서도 타인의 삶과 죽음을 관찰하고 증언한다.동호는 정대의 삶을, 정대는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을 증언한다.  한강 작가는 5월 광주를 증언하는 900여 명의 증언록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광주 뿐만이 아니라 국가 폭력의 다른 사례와 자료를 구해 인간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에 대한 책을 읽었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나미 검정볼펜으로 고문을 당한 23살의 교대 복학생 ‘나’는 평범한 모나미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끼어진 볼펜을 이용한 고문을 당했다. 하얗게 뼈가 드러나고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 들어 갔던 자리를 쓸어본다. 그들은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었고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거였다고 자조했다.  ‘나’는 대학 신입생 진수를 증언한다. 사실 그 친구가 마지막 밤에 남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총기를 모두 회수한 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청을 깨끗이 비워놓자고, 단 한사람도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학생들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남은 걸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저 친구는 자정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거라고. 김진수와 나를 포함해 열두 명이 한조가 되어 이층 소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통성명을 했습니다. 각자 간단한 유서를 써서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찾기 쉽도록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당장 닥쳐올 일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다는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상황실장이 복도로 김진수를 불러낸 건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여자들을 호위해 도청 밖으로 데려다 주라는 상황실장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까지 들렸습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건, 유난히 가냘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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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9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14)
       오늘밤 시민군이 모두 죽더라도 유족에게 확실히 연락이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동호 혼자서 여섯 시 안에 이것들을 정리해 관마다 붙여 놓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동호야아 ”하고 부르며 엄마가 트럭들 사이로 걸어왔다.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를 떨쳐내려고 동호는 손목을 뒤튼다. 남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떼어 냈다. “군대가 들어 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동호는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다 떼어내고 날쌔게 강당 안으로 도망쳤다. 뒤따라 들어오려는 동호의 엄마는, 집으로 관을 옮겨가려는 유족들의 행렬에 가로 막힌다. “여섯시에 여기 문 닫는데요 엄마” “문 닫으면 나도 들어 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동호가 목격한 정대의 죽음은, 그로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 남게 했다. 그렇게 해야된다는 그날의 양심이 죽음을 회피하지 못한 것이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 끝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은숙은 동호를 데리고 가려 했다. 동호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선 동호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동호의 눈꺼풀은 떨렸다. 작가는 동호를 ‘너’라고 2인층으로 서술한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시위대 선두에 같이 있다가 정대가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한다. 그후 동호는 도청에 남아 시신을 거두고 기록하며 정대의 시신을 찾는다. 정대는 시위대에 있다가 총탄에 맞아 죽은뒤 유령으로 남아 버려진 시신을 목격한다. 검은 숨, 공터에 버려진 시신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 질러 놓였어.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 넣기 시작했어. 곡물 자루들을 운반하는 것같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 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시시각각 저녁이 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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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5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3)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루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았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그 앞에서 애국가를 부른다. 왜일까?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 군인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총을 쐈다. 그들은 나라가 아니기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쓰러진 사자를 추도하며 유족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러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몇차례 위쪽 도로에서 들리더니,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빼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24-25쪽)  동호는 일요일에 천변길에서 목격한 성경 찬송가책을 손에든 신혼부부가 군인들에게  곤봉으로 마구 난타당하는 광경이 뇌리에 박혔다. 동호네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정대와 그의 누나 정미는 방직공장에 다니며 검정고시 보기 위해 공부를 했다. 동호 친구 정대가 광장에서 옆구  리에 총을 맞는 것을 봤다. 동호는 친구 정대와 정미 누나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동호는 상무관 출입구의 탁자 앞에 앉아 있다. 탁자 왼편에 장부를 펼쳐놓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일련번호, 전화번호나 주소를 십육절 갱지에 큼직하게 옮겨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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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1
  • [현대문학산책]한강,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12)
    다 쓴 음료수 병에 꽂은 양초들이 그들의 얼굴 곁에서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다. 강당의 안쪽 끝까지 너는 걸어 들어간다. 구석 자리에 뉘어 놓은 일곱사람의 기름한 형상을 본다. 이들은 정수리까지 완전히 흰 무명천으로 덮어 놓고, 젊은 여자나 아이를 찾는 사람들 에게만 잠깐씩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모습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맨 끝 모서리에 있는 사람의 상태가 가장 나쁘다. 처음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정강이를 넉넉히 덮었던 물방울무늬 주름치마는 이제 부풀어오른 무릎을 다 덮지 못한다. 너는 출입문으로 돌아온다. 탁자 아래 둔 박스에서 새 양초를 꺼내들고 모서리의 사람에게 돌아간다. 머리맡에서 가물가물 타고 있는 몽당초 불꽃에 새 초의 무명 심지를 기울인다. 불이 옮겨붙자 입김을 불어 몽당초를 꺼버리고, 데지 않게 조심조심 유리병에서 빼낸뒤 새 초를 꽂는다. 아직 뜨거운 몽당초를 한 손에 쥔 채 너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시취를 견디며 초의 불꽃을 들여다본다. 냄새를 태워준다는 반투명한 겉불꽃이 어른어른 타오른다. 주황색 속불꽃은 눈을 홀리듯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심을 노는 본다.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더 갈아줘야 할 초들이 없는지 찬찬히 살피며 너는 출입구를 향해 걷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 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이다.(10-13쪽) 동호는 키 순서로 배정되는 교실에서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열일곱살 고1 어린 동호를 보고 여기 있는건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나 동호는 고3이라고 둘러대며 상무대 자리를 지켰다. 동호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은 진수가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동호는 흰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사자의 몸을 덮고 있는 흰천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흰천은 죽은 것이 아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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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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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5) -황순원의
    우리는 샤머니즘에 대하여 취한 자세를 놓고 세 등장인물들에 대해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결의 강도로 보면 그 순서는 민구, 준태, 성호의 역순(逆順)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즉 민구는 대결이 아니라 오히려 포용 쪽이고, 준태가 다소 중도적이라고 한다면, 성호는 그 대결의 강도가 가장 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세 인물들 가운데 유랑인 근성을 제일로 대표할 사람은 민구이고, 그 다음이 준태이며, 성호만은 비유랑적인 인물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판단은 작가가 샤머니즘을 유랑성의 대표적 요인으로 설정했다는 전제를 놓고 볼 때 당연한 결론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약간 미심쩍은 것은 민구와 준태 두 사람 중에서 전자(민구)를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잡았다는 앞서의 평가에 대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얼른 보아 창애, 지연, 돌이엄마 등 세 ‘여성 편력’과 서울, 강원, 전북 등 세 ‘지역 유랑’으로 보아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보이는 이가 준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세 사람들 중 가장 유랑적인 인물로 준태가 아닌 민구를 택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준태의 그러한 면은 외형적(표면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임에 반하여, 민구의 그것은 내면적(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유랑성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논의 결과, 우리는 다음의 결론도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성호, 준태, 민구의 이러한 서열(?)은 곧 기독교도로서의 자격(자질)의 서열과도 일치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성호를 1번순위로 잡을 때 나머지 둘 중에 누가 더 기독교도로서의 자질(자격)을 갖추었느냐는 물음과 같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결론은, 민구보다는 준태가 더 앞서는 인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지금 기독교를 떠났고 교회당 출석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에겐 아직 기독교도로서의 자질이 소멸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겠다.    이 문제에 대해선 김병익 평론가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는 게 필요할 것이다.그는, 준태는 실상 끝까지 기독교를 버리지 못한 ‘부정적인 크리스천’이라 규정하고, 그가 아무리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선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설적인 기독교인의 반신론적 고백’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준태가 자기소멸과 에고로의 귀속을 통해 ‘부정적 기독교’를 구현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준태의 기독교 부정은 곧 ‘긍정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그런 부정적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들이 베푸는 사랑의 정도(밀도)와도 비례되는 것으로 보인다.    성호가 이타적 인물이란 것은 재언이 필요 없겠다. 준태 역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인물임은 앞서 우리가 본 바이다. 그러면 두 이타적인 인물 성호와 준태 중 어느 쪽이 더 사랑의 밀도가 강한가 하는 물음이 발해질 수도 있겠다. 그 답은 이미 작품상에 드러난 셈이다. 준태는 단순히 그의 친구에게 베푼 사랑을 보인 데 불과했지만, 성호는 보다 더 사회정의의 실현이란 고차원적 사랑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인의 자질은 그들이 베푸는 사랑의 밀도에 비례하는 것이란 말이 되겠다. 윤성호의 사랑을 실증해주는 상징적 장치가 바로 돌이와 영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즉 동거했던 무당여인이 남겨놓은 돌이마저 놔두고 준태가 죽게 되자, 지연의 손을 통해 그 아이를 건네받아 기르게 된 성호에겐 이미 그 아이보다 먼저 책임졌던 또 다른 고아 영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성호라고 하는 넓은 사랑의 바다는 준태의 것보다는 한 차원 높았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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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2-04-27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3)-황순원의
      <움직이는 성>에서의 다른 인물 함준태는 송민구와는 달리 기독교를 자신의 출세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중·고교 학생 시절 모범적인 기독교도였던 그는 후에 그 교회를 떠나버린다. 교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비판적이었던 그는 결국 그 교회를 박차고 세속사회로 나와 버렸다.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마치 이반 카라마조프의 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준태는 <삼대> 속의 병화와도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준태에게도 역시 구원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시사(示唆)하는 점이 이 소설의 한 특징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준태가, 실질적인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명목상의 무신론자라고 할 이반과 많이 닮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의 약점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속에서도 그는 그래도 신뢰할 만한 데가 있는 인물로 보인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과욕을 부릴 줄 모르는 그는 친구가 산간벽지로 전근을 가야만 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자청하여 저 자신이 친구 대신 벽지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희생적인 삶의 자세는 불가불 민구의 실리적인 생활 태도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도라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송민구에 비하여 교회를 박차고 떠나버린 함준태의 이웃사랑의 삶이 크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 즉 ‘이웃사랑’이라고 할 때 민구의 이기적인 삶과 준태의 이타적인 삶이 서로 대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진정한 사랑이 소멸되는 수가 있으며, 반대로 ‘교회 밖’에서도 그 사랑이 회복되는 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전번의 아내 창애와 헤어진 뒤, 새 여인 남지연이 끈질기게 준태를 따라다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끌림을 당하면서도 결코 거기에 빠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가 이렇게 매사에 자신이 없고 결단력이 없어 보이는 것은 그의 지병인 천식 때문인 성싶기도 하다. 그의 이 원인 모를 병은 그가 유랑의 생활이 아닌 ‘정착에의 기대’를 갖는 순간 그에게 다가오곤 했었던 것 같다. 그가 이 사실을 자각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후에 강원도의 오지로부터 전북의 어느 오지로 자신의 거처를 옮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거처를 지연에게는 전혀 알리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그는 그곳에서 끝내 운명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얼마간은 사모하고 있었던 지연과의 상봉을 다시는 이루지도 못한 채로였다.   이러한 준태의 상 역시 유랑인의 상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자신은 기독교 세계 이외의 유랑인의 대표적 인물로 함준태를 설정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기독교인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만큼 또 무교 신앙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면서, 그가 마지막에 만난 여인이 바로 무당인 돌이엄마였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유랑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기독교도 송민구’가 샤머니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역시 유랑인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함준태라고 할 때 그가 어떤 식으로든 샤머니즘의 세계와 관련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바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운명(죽음)은 그 무당 여인이 자기(준태)를 버리고 달아나버린 뒤에야 찾아왔었다는 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는 무속세계와 동류일 수가 없음이 증거 되기는 한 셈이다. 이 점에서 같은 유랑성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민구의 그것과 준태의 그것이 동질일 수는 없다 하겠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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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3
  • 다시 사는 4월의 은혜 - 부활절에 (유승우)
    정재규목사의 「생명의 부활」   다시 사는 4월의 은혜 - 부활절에 (유승우) 4월이 되면서 올해에도  코로나의 악몽을 뚫고,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봄볕과 봄바람을 보내시어 산과 들의 잠든 생명을 깨우신다. 겨울바람 속에서 춥게 잠들었던 알몸의 가지들이 파랗게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 아파트 그늘 밑 콩크리트 사이에서 메말랐던 민초 같은 풀꽃들도 사랑의 꽃등을 켜들고 환하게 웃는다. 아. 생명사랑의 끝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4월이여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번 부활절에는 성령의 빛이 되어,  성령의 봄볕으로 오시어, 부디 오시어 돈 우상에 얼어붙은 겨울들판 같은 우리들의 가슴을 녹여 주시어  우리들의 가슴에 사랑의 새싹이 돋고, 성령의 꽃이 활짝 피어나, 모두의 가슴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듬뿍 맺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가슴에 성령의 열매가 열려 백성사랑의 열매가 채워지게 하소서. 새로운 봄 동산이 열매를 많이 맺는 여름의 푸른 숲이 되게 하소서. 특히 이번 부활절에는  성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어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저 북한의  3대세습의 괴물이 녹아나게 하시고, 모스크바의 전쟁귀신 푸틴의 가슴에서 전쟁의 얼음뿌리가 녹아나게 하시고, 아프리카의 가난의 뿌리가 삭아져 아름다운 열매의 숲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성령의 훈풍과 사랑의 봄볕으로 아름답게 꽃피는 아름다운 부할절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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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3
  • 궁극적 관심을 지향하는 삶(1)-황순원의
    황순원의 장편소설 <움직이는 성>(1973)은 실로 기독교적 문제의식이 충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가 기독교 문제를 중심으로 이를 정면에서 다루기보다는 한국인의 유랑민 근성을 다루는 과정에서 기독교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데에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진다. 이 작품은 유랑적인 기독교와 비유랑적인 기독교, 그리고 유랑적인 샤머니즘, 이렇게 세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축을 대표하는 송민구 윤성호 함준태 등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관련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셈이다. 이리하여 <움직이는 성>은 유랑적 기독교의 송민구와 비유랑적 기독교의 윤성호, 그리고 다른 유랑적인 세계의 함준태 등 세 명의 복수주인공들을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기독교도이면서 샤머니즘에도 대단한 흥미를 지니고 있는 민속학자 송민구는 전형적인 유랑인 기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실리적인 인물로서 평소에 그 자신이 제창하던 ‘유랑민 근성의 극복’이란 구호 자체가 무색하리만큼 종국에 그 스스로 유랑적 근성을 드러내고 말며, 함준태는 비판적이면서 솔직한 면은 지니고 있으나 마침내 스스로 현실에 좌초해 버림으로써 유랑의 본질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윤성호만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하여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신(神)의 인류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로서의 실제적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터전’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 세 남자들에게는 각각 상대적 여성들이 등장함으로써 각기 한 쌍씩을 이루므로, 이 세 쌍이 펼치는 복잡다기한 이야기들이 그들 나름의 흥미를 독자에게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민구에게는 한은희가, 성호에게는 한 여사가, 그리고 준태에게는 남지연이 각기 상대역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세 쌍의 등장인물들이 각기 남녀주인공으로 나오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한 작품 안에서 합동으로 만나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복잡다기하게 얽혀지는 이야기가 곧 <움직이는 성>인 것이다. 스케일의 웅대함과 정교한 구조의 절묘함 및 소재 면의 다양성 때문에서도 이 작품은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을 전개한다거나 또 어느 한편에 치우친 편향적 진술을 하기 곤란하도록 스스로 장치된 셈이라 하겠지만, 작가 자신의 노련한 솜씨에 의해 적어도 한국의 6,70년대적 시대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30년대 초에 염상섭이 장편 <삼대>를 내어놓음으로써 2,30년대의 한국 사회풍속도를 그려 놓았던 역할을 황순원이 70년대 초에 재현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70년대 초에 이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의 6,70년대 사회풍속도를 효과적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삼대>의 경우에는 봉건주의와 기독교 및 사회주의 등이 통시적으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었지만, <움직이는 성>에 있어서는 개인주의(개인의 정숙주의)와 기독교 및 샤머니즘 등이 공시적으로 부딪치고 긴장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년대와 30년대 초에는 확실히 ‘봉건주의·기독교·사회주의’ 간의 상호갈등이 심화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봉건주의나 사회주의의 심각한 대두가 물러난 대신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개인주의 등이 기독교와 서로 부딪치는 양상을 노정했던 것으로 작가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지 이야기하고 보면, 위의 각각의 세 요소들 가운데 유독 기독교만은 양(兩) 시대에 두루 걸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3-30
  • 한국 기독교, 그 심층적 해부(5)-염상섭의
      <삼대>의 여주인공 홍경애는 조상훈의 아들 덕기와 어느 소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동기 동창 관계이다. 그 학교는 조상훈이 얼마간의 기부금을 낸 관계로 그가 설립자의 명의를 한 몫 가지고 있는 교회학교였다. 바로 이 학교에서 덕기와 경애는 함께 공부하는 가운데 서로 알게 된 것이었다. 경애는 이처럼 덕기와는 동창 관계이고, 덕기의 부친 조상훈과는 사제지간의 관계이다.   이러한 그들 상호간의 관계는 얼마 지난 뒤 바뀌어지게 되었다. 경애가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때, 그리고 애국지사였던 그녀의 부친이 감옥에서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가출옥하였을 때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부친이 위태하다는 소문을 듣고 조상훈은 그를 문병하러 간 것이었다. 병자는 신장염에다 기관지병이 겹쳐서 한마디로 중태였다. 상훈은 문병이 끝나고 귀가한 뒤, 인삼 몇 뿌리에 쌀 한 가마니 표와 돈 얼마가 든 봉투를 경애를 통해 보낸다. 며칠 후에는 자기 집 단골 의사를 소개하여 진찰을 받게 해 주기도 하였으나 병자의 건강이 근본적으로 호전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해가 바뀐 뒤, 노 지사는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임종 현장에서 당사자의 유언도 있고 하여 상훈은 지사의 남은 모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교회 안에서도 애국지사의 유가족을 끝끝내 돌보아주는 상훈의 그 독지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럴 즈음 여학교를 졸업한 경애가 설립자 대표인 상훈의 추천으로 그 학교의 선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훈과 경애의 관계를 두고 심상찮은 소문들이 오고갔다. 당황한 경애는 자신을 수원 지역의 학교로라도 옮겨 달라고 부탁해 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아래, 결국 감기로 인해 한 이틀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조상훈을 만나러 그의 댁을 찾아갔다. 그녀의 이 잦은 방문이 빌미가 되어 두 사람 사이는 깊은 관계로 변한 것이었다. 경애는 딸아이를 낳게 되었으며, 상훈의 실제적인 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 태어난 그 계집아이는 덕기의 이복누이 동생이 되었고, 경애는 덕기의 단순한 동창생의 신분에서 이제는 그의 서모의 위치로까지 뒤바뀌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변화는 경애 모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전도부인이던 경애 모친은, 세상을 숨기고 낳은 목숨(손녀) 때문에 교회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으며 당사자(경애) 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경애의 처지는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조상훈은 경애가 아이를 낳자 세상 이목이 두려워 그녀를 의식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생활 대책조차 세워주지 않았다. 아이는 병들어 40도의 고열을 호소하는 형편인데도 아버지는 그의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점차 경애의 타락상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친구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술집 ‘바커스’의 여급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인들 어찌할 것인가. 현실 타개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절망감의 가벼운 해소책의 일환으로도 그녀는 이런 길을 택할 수밖에는 없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훌륭한 아버지(애국지사)와 전도부인인 어머니, 그리고 그녀 자신도 교회학교를 거쳐 후에는 그 기독교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던 독실한 여신도 홍경애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그녀의 몰락상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홍경애는 미래지향적인 청년 김병화를 만나게 되면서, 소아적이었던 그녀의 삶이 이후 점차로 대승적인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3-17
  • 한국기독교문협 제56회 서면총회,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 다짐
    130명의 작품 수록한 「기독교문학」 제43집과 동화집 발행 문학사랑방과 세미나, 계간 문학잡지 발행 등 사업을 추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이사장=이수영시인·사진)는 제56회 총회를 자난 8일 ‘코로나19’로 인해 서면으로 가졌다. 이번 총회는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에 중점을 두고, 문학사랑방과 세미나, 에세이집과 연간집 발간 등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또한 계간 〈기독교문학〉발행을 위한 기금모금에 앞장 서기로 했다.   이번 총회에서 이수영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해서 모임과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세미나와 문학사랑방 등 행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동문학분과 주관으로 동화집 <안녕, 상상 숲 오두막>을 발간하여 회원들과 전국 도서관 400여 곳에 배포하고, 전국 서점에서도 판매중이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에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또한 이이사장은 “해마다 발행되고 있는 〈기독교문학〉을 계간으로 발행하기 위해 기금모금 중에 있다. 지난 회기에도 회원들이 참여해 620만원을 입금해 주셨다. 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적극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고 덧붙혔다.   이번 총회를 기해 연간집인 〈기독교문학〉 제43집과 동화집 〈안녕, 상상 숲 오두막〉(창조문예사 펴냄)을 펴냈다.    〈기독교문학〉은 이이사장의 「권두단상」을 비롯한 평론에 6명, 시에 90명, 소설에 5명, 희곡 1명, 동시에 6명, 동화에 7명, 수필에 14명 등 130여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수록된 작품들은 지난 해인 2021년의 한국 기독교문학에 대한 현주소이다. 지난 해에 발표된 작품과 그 수준의 작품 중에서 자선해 게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화집은 동협회 아동분과(위원장=이명희아동문학가)의 회원이 중심이 되어 펴냈다. 엄기원원로아동문학가의 「짹짹이네 크리스마스」를 바롯한 강정규의 「엿이야기」, 한상남의 「피피와 어린양 세모」 등 19명의 동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수영이사장은 “‘코로나19’로 모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2020년 시집과 에세이집을 펴내고, 이번에는 동화집을 편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이사장은 “금년에도 ‘코로나19’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에세이집을 펴낼 계획을 세웠다”고 덧붙혔다. 이 에세이집은 ‘감사’를 주제로 편집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회보」4회 발행을 비롯한 △연간집 〈기독교문학〉제44집 발행 △‘감사’를 주제로 「에세이집」발행, △교회순회해 문학적 간증과 시낭송 등으로 갖는 「문학사랑방」 △한국 기독교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한 세미나 △계간 〈기독교문학〉발행을 위한 기금모금 등 사업을 확정했다.   한편 동협회는 이날 임원회를 기독교신문에서 갖고 서면총회에 따른 결의사항을 점검했다. 이이사장은 “무엇보다도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세미나와 문학사랑방 등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할 것 같다”면서, “문학을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문학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날 임원회에서는 에세이집 발간을 위한 편집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현재 수필분과 위원장인 박정미수필가로 선정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3-1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5)-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의 주인공 최문선은, 자신이야 이왕 실명(失明)되었지만 이 청년(이치한)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실제적으로 그 청년 대신, 자신이 모든 범행을 저지른 당사자라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진범인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마는 것이다. 이리하여 최문선은 꼼짝없이 인순이란 이름의 여인을 살해한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가 사형이란 극형을 언도받기까지,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형사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악형(고문)을 받고 있었으며 그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일시 유혹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진범(이치한)을 고해바치지 않았다.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아픔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간 살인 누명에 따른 정신적 고통에다가 고문이라는 육체적 고통까지 극한에 달해 있었던 그의 처지를 헤아리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곧 진리를 말로만 하거나 글로만 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생활(실천)할 수 있는 첫 문이 열리게 된 기회가 그 혐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신에게 찾아오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받아들이자 문선은 진리를 비로소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여기게 되었고, 또한 진리를 생활(실천)할 수 있는 ‘행복’을 가져다준 그 청년에 대하여 우정마저 느끼게 되었다. 불행의 근원인 원수가 당장 행복을 가져다주는 친구로 변했던 것이다. 결심 공판에서 문선은 자신의 추악한 누명을 “나의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다.”고 하였다.   강간(미수) 살인이라고 하는 추악한 누명조차도 십자가의 기쁨으로 변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문선의 신앙에 깃들어 있는 ‘고난의 신비주의’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십자가의 고난의 신비주의로 인하여 문선은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받고서도 그 얼굴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실망하는 빛도 없이 태연할 수 있었으며, 객관적인 부당한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항소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기가 앞으로 당하게 될 처형(處刑)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신 은혜요 선물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느끼면서 감격의 오열마저 터뜨리는 최문선의 경지는 가위 ‘사랑의 신비주의’의 극한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다는 감격과 함께 그러한 사랑의 은혜를, 이웃(이치한)에 대한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곧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는 최문선의 심적 상태는 ‘사랑의 신비주의’의 한 전형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이용도의 신비주의적 태도를 대비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싶은 그 의복을 불쌍한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주님께 대접하고 싶은 그 음식을 거지에게 나눠 먹이어 이로써 예수를 사랑하고 싶은 애끓는 정을 표하는 것이올시다.”   최문선의 이치한에 대한 사랑은 곧 그(치한)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 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랑의 신비주의’ 정신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원수를 친구로 여기며, 불행을 행복으로 여기는 일, 그리고 누명 쓴 것을 십자가로 여겨 기뻐한 일, 게다가 앞으로 당할 처형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 내지는 사랑이라고 여겨 ‘감격의 오열’을 터뜨린 일 등, 이러한 사실들은 곧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라는 관점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특이 사항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2-08
  • 「창조문예」서 시상식 · 300호 발행 감사예배, 한국문학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25년동안 한 호도 결호없이 300호까지 발행한 저력을 과시 ‘창조문예’통해 한국문학 속에 기독교문학의 육성에 기여 월간 『창조문예』(발행인=임만호시인)는 제18회 『창조문예』문학상 및 제9회 『창조문예』문예상, 그리고 지난 해에 등단한 신인 5명에 대한 등단패 수여식을 지난 18일 밀알학교 강당에서 갖고, 한국문학의 발전과 향상에 기여키로 다짐했다. 『창조문학상』은 김년균원로시인, 『창조문예』문예상은 권은영시인이 수상했다. 또한 『창조문예』 300호 발행과 크리스찬서적 46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도 드렸다. 이날 제1부 감사에배는 『창조문예』문인회 부회장인 김광영시인의 사회로 시인인 김상곤목사의 기도, 시인인 소강석목사의 「사과나무 아래서 쓴 연서」란 제목의 설교, 시인인 박종구목사의 축도 등 순서로 진행했다. 제2부 시상식은 『창조문예』주간인 최규창시인의 사회로 진행했다. 임만호 발행인의 인사말에 이어 문학평론가인 이명재교수(중앙대)의 심사평, 시상식, 등단패 및 공로패 수여. 축사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인 이광복작가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직전 이사장인 손해일시인, 복음성가 가수인 김석균목사의 축가, 케익절단 등 순서로 진행했다. 특히 『창조문예』문학상 수상자인 김년균원로시인과 『창조문예』문예상 수상자인 권은영시인에게 상패와 상금을 수여했다. 또한 지난해부터 ‘제2회 추천’제도에 의해 등단한 최귀례시인과 박예손소설가, 신현숙시인, 신길자수필가, 김영애수필가에 대한 등단패수여식과 『창조문예』문인회 직전회장인 김송수시인에게 권은영회장이 공로패도 수여했다.   이날 『창조문예』문학상을 수상한 김년균시인의 시집 『자연이다』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연환경 문제에 대한 걸맞은 소재와 주제로 형상화했다. 심사위원 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질서 보전’이란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해 주셨고, 우리는 그대로 보전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전보다는 파괴만 일삼아 왔음을 일깨워 주는 잠언적인 시들이다. 이러한 그의 시들은 자연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을 비롯한 풀과 산 등 시적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은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깊은 의미를 담아 감동을 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박하고 순수한 서정적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간결한 서정적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의 창출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시어의 배열과 간결함, 구성의 통일된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시의 틀이 견고한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또한 『창조문예』문예상을 수상한 권은영시인의 시집 『길 위에서』는 자연과 고향, 그리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했다. 깊은 서정과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신앙의 시각이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들은 서정과 신앙을 접목해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시들은 선명한 이미지와 부드럽고 따뜻한 시어로 추구해 ‘일깨움’과 ‘깨달음’의 감동을 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성하고 전개하는 기법의 성숙함을 보여 준다.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신앙의 삶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화된 삶의 모습으로 대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 대부분은 ‘일깨움’과 ‘깨달음’으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권은영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삶이 지닌 이미지를 객관화된 삶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존재하는 대상을 설명해 전달하기 위한 수식적 형식이 아니라, 역동적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이미지에 의존하여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며 감성적이다. 이미지는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2-08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4)-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기독교 정신은 한마디로 말해 고난과 사랑의 정신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사실상 극도의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고통은 마치 예수께서 커다란 아픔(고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작 장본인인 예수는 그 아픔을 통감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그런 성격의 것일 뿐이다.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제삼자(독자)의 처지에서 보면 무척 고통스러울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등장인물)들은 신비스럽다고 할 정도로 ‘태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순애보>의 등장인물은 일종의 ‘이용도의 분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쫓기는 위치에 처해 있는 한준명이나 최태용, 또는 김성실과 같은 사람들(모 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멀리함으로써 지금껏 자신에게 가해져온 오해를 스스로 풀어볼 궁리는 전혀 해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포용함으로써 그 자신이 그들과 똑같다는 평가를 받는 위치에 처해짐으로 인해 완전히 피해만 입는 이용도였지만,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가 있었으니 그가 괴로울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마찬가지이다.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은 거개가 이용도의 이러한 마음을 닮아 있다. 그러나 이용도의 그 ‘고난을 감내하는 마음’이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그 무한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마음’들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있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이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순애보>의 등장인물들의 그 ‘고난과 사랑’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때의 고난과 사랑은 거의 신비적인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신비주의에 깊이 빠진 이용도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고난, 또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실천에 옮기기 힘든 사랑, 마치 산상수훈에나 나타나는 그런 극한적인 사랑이 박계주의 <순애보>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순애보’) 속에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가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등장인물들은 고난 속에서도 극한적인 사랑을 기울이는, 무아와 황홀의 지경에 빠져 있는 열광주의적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그 때문에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이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이라고 표현하여 대과(大過)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강조적으로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이용도에게 있어서 고난과 사랑의 신비주의가 결코 무슨 신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것은 언행일치의 실천 단계로 곧장 이어진 것이란 바로 그 점이었듯이, <순애보>의 등장인물들도 그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최문선은 자기를 눈멀게 하고 강간 살인범으로 몰아넣은 진범(이치한)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원망의 감정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인공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돼 있으면서도 진범을 고해바치지 않은 행위 속에는 거의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 수반되고 있으며, 그의 그런 행위 속에 극한적 이웃사랑의 정신이 엿보인다 하겠으니, 이런 이상주의적이고 현실초월적인 장면 설정 속에서 우리는 예의 그 신비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1-26
  • 인간화 지향과 기독교 신비주의(3)-박계주의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타난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용도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이용도 사상의 골자는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이다. 먼저, 이용도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의 목표는 십자가를 진 고난의 주를 몸소 체험하고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아픔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는 데 두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그는 주로 요한복음을 통해 받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시작하자 곧 그에게 죽음의 위협(고난)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내용 설정이라면, 예수의 고난은 숙명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며, 그런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야 할 이용도나 다른 신도들의 고난도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성 프란체스코처럼 가난을 거룩하게 보고 청빈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이용도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 실천적인 삶을 스스로 살았던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 사상은 그의 그런 삶의 실천이란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 그의 고난의 신비주의는 동시에 ‘사랑의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그에게 고난의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는 불가분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것이다. 이용도의 그리스도 사랑의 이해 기반에는 시무언(是無言)의 사랑, 곧 침묵의 사랑이 개입되어 있으니, 이는 곧 무차별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아가서적 모티브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그 열도가 역시 아가서의 한 구절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정도만큼 강렬하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에는 예수께서 그 중심에 있다. 이용도는 예수를 요한복음과 아가서에 기준하여 아픔(고난)과 사랑의 본질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용도는 예수의 사랑의 지상 명령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켰지만, 그러나 그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어느 면에서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을 보이는 약점도 노출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문학자 조동일이 <순애보>를 논하는 가운데 아래와 같은 해석을 내린 것이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이용도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함에 역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같다.   “주인공이 강간, 살인의 누명을 쓰게 한 원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주인공이 사형언도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무의미한 희생이 기독교 정신의 발로라고 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물론 주인공의 그런 행위가 ‘무의미한 희생’일는지도 모르며, 어느 면에선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기독교 정신’ 발로의 결과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 정신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때만 그 ‘사랑의 무제약적인 면’, 또는 주인공의 ‘소박한 무차별의 사랑’이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국문학자 조동일은 이 작품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이광수 소설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했다.”라고 했는데, 여기 ‘이광수의 기독교적 사랑’보다 더욱 강하게 역설된 내용이란 것이 달리 말하면 곧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적인 사랑이 곧 이광수의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사랑보다 더 강렬할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평론가 홍정선이 “<순애보>의 사랑은 이광수 소설의 사랑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란 요지로 말한 것이 실은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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