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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3.09.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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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임영천.JPG

 

화자 는 그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심양을 거쳐 단동 시내를 경유해 압록강변의 신의주 근처에 당도한다. 그러나 신의주는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철조망 안은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학실이 아빠)에게 철조망 안으로 두 발을 들여 넣어 보라고 하였다. “여기가 바로 신의주입니다. 할아버지의 고향 땅입니다.어서요. 여기가 바로 신의주 땅이라니까요.” 그 뒤의 상황 진전을 소설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노인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당겼다. 어서 철조망 밑으로 두 발을 넣으라고 재촉했다. 노란색이 살짝 도는 국방색 군복을 입고 붉은 테를 두른 군모를 쓴 북한 경비병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총을 메고 다가왔다. 노인의 어디에 그런 날렵함이 숨어 있었을까. 잽싸게 양쪽 발을 철조망 밑으로 집어넣어 쿵쿵 디뎌 보고는 냅다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학실이 아빠, 도망가지 마세요. 괜찮아요. 북한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학실이 엄마 소식을 물어봐도 된다니까요. 나는 북한 경비병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고 노인이 던져버린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놀라 달아나는 할아버지 이상(以上)으로, 또 갑작스런 결과에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뒤쫓기 시작한 화자 의 놀라움 이상으로, 우리 독자들도 함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굉장한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가 이 소설의 마지막 장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서프라이즈 엔딩의 효과는 이 소설 초반에 이미 사실상의 복선이 깔림으로써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서프라이즈 엔딩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 할아버지가 아직도 못 미더워 에게 다음과 같이 자꾸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대화의 장면에서 그 면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잡아가지 않을까. 자네 혹시 정보부에서 나온 정보원 아닌가?”

 

두 발로 북한의 신의주 땅을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을 밟는 순간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팔순 노인이 달아난다고 해서 얼마나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심리적 공포감은 그를 한 발짝이라도 더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다.

 

북한 경비병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 같고, 혹시 이 동행 청년이 그(할아버지)로 하여금 북한 땅을 밟게 만든 다음 증거를 잡았다고 정보부로 연행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포로병 생활 때의 과거 악몽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그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정이 아직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이 할아버지와 같은 불안한 기억 속에서 결코 헤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 노인의 고초를 통해, 우리가 어떤 국가적 환경(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 이 작품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민족적 현실 문제에 그 메스를 들이대려고 한 기독교 현실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 하겠으며, 또한 통일 지향적 정신의 기독교 민족문학 작품으로 우리 기독교문학사에서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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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③-이건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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